경북일대 '미군 한국전 양민학살' 실상과 대책

입력 1999-10-15 15:32:00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등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등으로 민간인들이 대량 학살됐다는 주장이 잇따라 제기되면서 사건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격전을 치렀던 낙동강 전선등 경남북 일대의 경우 AP통신 보도를 계기로 피해증언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또 각 지방자치단체가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인 내년을 앞두고 각종 기념 사업을 준비중에 있으나 전쟁당시 미군등에 의해 억울한 피해를 당한 주민들에 대한 보상, 추모사업등은 준비되지 않고 있어 진상조사후 위령비건립등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양민학살 주장이 제기된 칠곡 고령 예천 등 경북 일대 피해마을 주민들의 현장 증언등을 토대로 당시 피해상황과 주장, 지방자치단체등의 진상규명대책등을 점검해본다. 편집자 주

--현재까지 거론된 적 없어

▨칠곡

한국전쟁 당시 대구와 부산이 함락위기에 놓인 50년 8월3일 미군은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격전을 벌이다 적도하를 방지하기위해 왜관교를 폭파,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 수백명이 숨진 것으로 AP통신은 전하고 있다.

경북 칠곡군 왜관교는 당시 김천∼대구간 4번국도를 잇는 유일한 인도교로 수많은 피란민과 군인들로 붐볐다. 7월 중순까지 수십만의 피란민들이 내려와 왜관교 폭파 수일전에는 하루에도 2만5천여명이 낙동강을 건너 좁은 아군지역으로 몰려 들었다.

왜관읍에 주둔한 당시 미군 제 1기병사단은 휘하 부대가 김천서 칠곡군 왜관읍으로 철수를 완료한 후 군사 작전상 한강교와 버금가는 왜관교를 폭파해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미군 제1기병사단은 8월 3일 아침부터 낙동강으로부터 8㎞이내에 거주하는 전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경찰서 사이렌과 전단, 확성기 등을 통해 이를 알렸다.미군 제1기병사단은 피란민들이 왜관교를 건너 소개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했으나 피란민들은 도강 기회를 보고 있다가 3일 해질 무렵 미군 제8연대가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너려 하자 뒤따라 몰려 왔다.

미군 제1기병사단은 사격 위협을 해도 필사적으로 따라 오는데 어쩔 수 없이 폭파시기를 놓쳐 버렸고 그 사이 날은 저물어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되자 제1기병사단장 호버트 레이먼드 게이 소장은 3일 오후 8시30분 폭파 명령을 내렸다.

이후 미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전차 도하를 막은 뒤 8월 16일에는 미군B29 폭격기 98대를 동원해 강 건너편 일대(67㎢)에 26분동안 폭탄 90t을 투하, 인민군 4만여명 중 3만여명을 숨지게 한 것으로 전사에 기록돼 있다. 한편 왜관교 폭파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칠곡군 주민들은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칠곡군청도 칠곡군지등의 기록에 이같은 학살 내용이 일부 있어 미국 AP통신이 확인한 내용들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은 하지만 막상 지역에 목격자나 증언을 해줄 사람이 없어 향후 대처 방안을 놓고 고심하고 있다.

또 왜관교 폭파 직전 다리를 미처 건너지 못한 칠곡군 약목면 일대 피란 세대들은 상당수의 피란민이 교량 폭파 과정등에서 미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목격이 아닌 이야기를 전해 들었거나 그랬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어서 진상 규명에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는 실정.

게다가 한미 양국간에 상당히 비중있는 문제인 만큼 주민들은 증언하길 꺼리는 듯한 분위기마저 보이고 있다.

또한 희생된 피란민 대부분이 남하하는 사람들이어서 지역의 희생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현재까지 칠곡에는 이 문제가 거론된 적이 한번도 없었고 군지.전사자료등에도 피란민 학살이란 용어는 아예 없어 이같은 의견들을 뒷받침하고 있다. 공무원, 전우회 회원등 대부분 주민들은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미군에 의해 왜관교가 폭파됐다는 것은 알지만 수백명 피살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고 말할 정도.

다만 칠곡군지 기록에는 왜관교 폭파후 적에게 쫓긴 피란민들이 수심이 얕은 쪽으로 강을 건너면서 등에 업은 아기가 익사한 줄도 모르고 건너는등 희생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어 남하 피란민 상당수가 희생됐을 가능성이 높다.

칠곡군의 한 관계자는 "당시 정황으로 미뤄 희생자가 많지 않았겠느냐는 막연한 추정일뿐 현재로선 목격자나 증거, 자료가 없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지역민의 희생은 없었다 하더라도 희생자가 수백명에 달한 만큼 군청에 희생자 및 목격자 접수 창구를 개설해 진상을 규명하는 방안등 여러 대안을 구상중"이라고 덧붙였다.

--고깃배로 건너다 참변

▨고령

6.25당시 미군들은 8월3일 오전 7시 고령교(고령군 성산면 득성리)를 폭파, 수십명이 숨졌으며 일부 피란민들이 낙동강을 헤엄치거나 고깃배로 건너다 미군들의 발포로 숨진것으로 나타났다.

고령읍에서 살다 피란을 갔던 김종결(67.고령읍 지산리)씨는 고령교 폭파이후 미군들은 낙동강변에 모여있는 피란민들을 향해 비행기로 기총사격을 하는 바람에 상당한 인명이 숨졌으며 4대의 비행기가 편대를 이루며 고령군내 마을 곳곳에 북한군들을 소탕하기위해 소이탄과 폭탄을 투하하고 이어서 기총사격을 하는 방식으로 집이 불타고 상당한 인명이 숨졌다고 했다.

또 김씨는 고령교폭파로 고깃배가 많은 개진면 개포리에는 피란민들이 고깃배로 건너다 비행기의 기총사격으로 6~7명이 피해를 입자 낙동강 도하를 포기했다며 당시 고령읍에서 피란을 갔던 김씨의 친구 정모(당시18세)씨가 숨졌다고 주장했다.우곡면 도진리 노영옥(68)씨는 "비행기의 공격으로 마을노인 4명과 19세된 처녀1명이 숨졌다"고 증언했으며 쌍림면 안화리 이장 곽정만(61)씨는 "비행기의 공격으로 마을주민 7명정도가 숨졌으며 백모씨는 당시 복부 관통상을 입었으며 이때문에 제삿날이 같은 집이 여럿 있다"고 회고했다.

특히 미군들은 인민군들을 소탕하기위해 고령군내 마을곳곳에 비행기 4대씩 편대를 지어 소이탄을 투하하면서 불을 질러 뛰어나오는 사람을 뒤따라오던 비행기에서 기총사격을 하는 방법으로 민간인들을 무참히 죽인것으로 목격자들은 증언해 피해가 많은것으로 나타났다.

--일가족 9명 한꺼번에 숨져

▨구미

빨강 파랑색의 아름다운 주택과 높고 낮은 아파트가 빼곡이 들어서 신도심지로 조성된 구미 금오산 자락밑 형곡동.

겉으론 한없이 평온한 모습인 이곳은 매년 음력 7월2일이면 30여 가구에서 각가정마다 제사를 지내는등 동네전체가 향냄새에 휩싸여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50년전 6.25가 발발한후 2개월이 지난 8월 16일. 형곡동의 옛이름인 속칭 사창마을과 시무실마을 180여가구가 미군의 오인폭격으로 삽시간에 평온하던 마을전체가 쑥밭으로 변해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던 30여 가구 130여명의 주민들(당시 공식신고된 사망주민)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갑자기 산너머에서 B-29 폭격기 8, 9대가 위-윙하는 웅장한 굉음을 내며 한꺼번에 몰려와 2, 3차례에 걸쳐 수백개의 폭탄을 쏟아부어 산과 들판은 물론 동네전체가 불바다가돼 집안에 있던 주민들과 마을앞 갱변에서 천막을 치고있던 피란민 수백명이 한꺼번에 몰살 당했지요"

당시 미군기의 폭격으로 9명의 가족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던 이종록(75.구미시 형곡동)씨와 부인 장재연(72)씨는 50년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한맺힌 이야기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시 25세였던 이씨는 이때의 폭격으로 집안에 있던 모친(정쾌희.당시 50세)과 동생(이종이.19) 여동생(이종순.17), 맡아들(재원.4)등 4명과 이종화(19)등 4촌 여동생 4명과 7세된 조카등 9명의 가족이 몰살 당했다는것.

식구들중 다행히 부인 장씨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온몸에 파편이 박히고 새카맣게 그을린채 폭탄이 떨어진 구덩이에서 구조됐으나 그당시의 휴유증으로 지금도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장씨 "미군비행기가 2, 3차례 폭탄을 퍼붓고 사라지자 또다시 호주기(제트기)가 뒤따라와 생존자들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고 술회하며 가슴을 떨었다.

마을주민인 김왕개씨(사망.85)씨집은 한꺼번에 12명의 가족이 피해를 당한 것으로 알려지는등 당시 피난을 가지 못했던 마을주민들의 대부분이 집단 피해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미시 문화원장을 역임한 김교홍씨(66.구미시 형곡동)도 이날 폭격으로 모친(최해명.당시 51세)을 잃어버린 동일한 피해자다.

김 전문화원장은 "형곡동은 마을모양이 소가 엎드린 모습이라고 우복동 이라고 할 정도로 산으로 둘러싸인 교묘한 지형으로 6.25당시 마을앞 개천에 김천, 약목, 북삼등 인근지역에서 수천명의 피난민이 몰려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위령탑 건립 등 소원

▨예천

"억울하게 죽은 부모.형제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미군기에 의해 희생된 사실을 꼭 밝혀져야 합니다"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안생모(76.당시 목격자)씨 등 마을 주민 30여명은 지난 51년 1월19일(음력 12월11일) 아침 인민군 낙오병을 뒤 쫓던 아군 30여명이 마을에서 아침밥을 먹고 떠난뒤 불과 3, 4시간 후 전투기 6대가 갑자기 마을에 휘발유를 뿌리고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마구 쏴 노약자.어린이.부녀자 50여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80여명이 총에 맞거나 화상을 입었다며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24세던 목격자 안순모(74)씨 등 목격자들은 "미군 폭격기가 인민군 낙오병이 숨여 있는 안동군 서후면 신정마을을 폭격 한다는 것이 산성 마을을 폭격 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현재 산성마을 60여호 중 30, 40호가 음력 12월 11일날 동시에 제각기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빠른 시일내 사실 규명돼 합동으로 제사를 지낼수 있는 장소와 위령탑을 세우는 것이 후손들의 바람 이라고 말했다.

사회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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