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뉴스를 대하는 태도

입력 1999-10-15 00:00:00

한 10년 지난 다음, 1999년의 신문을 들춰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옷로비 의혹 사건'에 대한 일련의 보도를 보고 많이 놀랄 것이다.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국회의 청문회까지 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특별검사의 조사까지 보도되면 그 의아함은 더욱 커질 것이다. 국회의원이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청문회가 시간낭비였음을 한탄할 것이다. 이 사건의 성격을 분명하게 말한 사람은 다름아닌 출두한 한 증인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옷값 대납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

지금 우리에게는 감정적이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뉴스를 좋아하고 이를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감성적인 정보와 이성적인 정보를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외 토픽의 뉴스였던 '한 인도네시아인이 뱀이 들끓는 우리에 들어가 49일을 생활하게 될 것'이라는 뉴스는 말하자면 호기심과 감성적 반응에 기대는 연성(軟性)뉴스인 반면 지난 9월 한반도에 접근했던 태풍 바트호의 진로에 대한 뉴스는 경성(硬性)뉴스다. 소프트 뉴스라고 불리는 연성 뉴스는 동정심과 호기심에 근거하므로 정확성은 2차적이다. 그러나 하드 뉴스라고 불리는 경성 뉴스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시간과 원인 등 감정을 배제한 6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옷 로비사건은 하드 뉴스 안에 포함된 소프트적인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뉴스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사건은 사건에 내재된 연성적 성격을 확대함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에 영합하여 큰 사건인 것 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성공한 경우다. 우리는 텔리비전 뉴스에서 이러한 뉴스의 성격 혼동을 많이 본다. 뉴스의 성격을 혼동하려는 성향이 기자의 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태풍 바트호의 보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지난 9월말 한 텔리비전 뉴스는 태풍 바트호의 진로에 관심을 갖고 지켜 보는 시청자에게 "태풍 바트호의 목표는 한반도가 아니었습니다. 태풍 바트호는 오늘 오후 일본 열도에 상륙해 일본의 규슈지방을 강타했습니다"라는 말로 보도를 시작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 기자의 뉴스 제작태도와 의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음을 절감한다. 태풍은 자연현상이며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태풍에 감성을 부여한 것은 그의 상상력이지만 그러한 상상력은 뉴스 보도에는 금물이다.

권희로 사건의 보도 역시 그러한 면이 강하다. 뉴스의 연성적인 면을 극도로 확대하여 보도함으로써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었으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자와 카메라가 따라 다니게 만들었다. 과연 옳은 일일까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한국인 차별에 항의한 그의 지사적 동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인범으로 오랜 기간을 복역했다. 우리가 그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의 방법을 후손들에게 옳은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뉴스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우리가 관심있게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는 세계를 너무나 감성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 뉴스의 관점은 감정적이고 서술은 문학적이다. 서해에서 북한 함정과 교전이 있었던 다음날, 한 뉴스는 동해항에서 북한으로 보낼 쌀을 싣고 있는 한 부두노동자에 대해 "표정은 평온하지만 내심은 불안하다"고 보도하였다. 속마음까지 들여다 보는 기자의 눈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그가 소설가를 지망하고 있음을 눈치채야 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뉴스 보도의 태도와 뉴스의 성격, 그리고 그 방법 모두가 우리의 세계관을 이룬다. 지금 우리는 좀 더 냉정한 세계관을 가져야 함을 절감해야 할 때다. 21세기를 눈 앞에 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변하고 있는 것은 과학적 지식이다. 과학적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세계를 따라가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외국신문에 보도되는 뉴스를 되도록 많이 알려주어야 한다. 그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밖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세계에 대해 장님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서우석(서울대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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