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돈상 제1회 본상 수상자-양기탁 선생

입력 1999-10-06 14:52:00

서상돈상 제1회 본상 수상자로 선정된 우강(雩岡) 양기탁 선생은 당시 주필로 몸담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모든 사세를 기울여 국채보상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서상돈상 심사위원회는 "선생을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상의 정신을 만대에 전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방만한 외채 도입 때문에 국가경제의 운용을 국제통화기금에 맡기게 된 지금의 경제상황에서 볼 때 실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양기탁 선생은 일제의 침략·강점이라는 수난기에 민족지도자이자 언론인으로서 큰 발자취를 남겨 정부는 지난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먼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한국 침략을 노골화한 시기에 즈음해 언론인으로서 펼친 항일구국논조를 중심으로 선생의 행적을 살펴보자. 그해 7월 18일 선생은 영국인 배설(裵設:Bethell)을 명의상 사장으로 추대하고 한영합작으로 국한문혼용체인 일간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당시 주필이자 총무로 있던 선생은 이듬해인 1905년 8월 '코리아 데일리 뉴스'라는 제호의 영문판을 별도로 발행하기도 했다.

그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일제와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는데 주력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즉각 게재하고 이를 영문으로 번역해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도 게재, 세계에 알렸다. 당시 다른 신문들은 일제 통감부의 '신문지법'에 의한 통제 탓에 공정한 보도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외국인이 형식상 사주로 있는 대한매일신보는 법의 저촉 대상에서 제외돼 사전 검열을 거치지 않고 발행할 수 있었다.이러한 이점을 활용해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운동 등 구한말 국권회복운동의 대변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필봉을 자랑하는 대표적 항일지로서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으나 일제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됐다.

1907년 2월 서상돈 선생이 김광제 등과 함께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에 대해서도 양기탁 선생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다른 신문보다 열정적으로 '국채 1천300만환 보상취지'를 비롯한 기사와 논설, 특별사고 등을 보도했다. 또 그해 4월초 일부 유지들과 함께 신문사 사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결성, 선생이 직접 회계업무를 맡아 전국 각지에서 답지하는 의연금을 수납했다.

이처럼 적극적이고 구국적인 논조에 자극받은 일제 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을 배일운동이라 단정짓고 악랄한 탄압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이른바 '국채보상금 비소사건'이다. 일제는 국채보상 의연금을 횡령, 소비했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로 선생을 구속했다. 그러나 사장 배설이 공소 사실의 허위조작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자 얼마뒤 선생을 결국 무죄 석방했다. 처음부터 일제가 노린 것은 의연금 횡령에 대한 수사가 아니라 선생에 대한 탄압과 국채보상운동의 와해에 있었다.

1871년(고종 8년)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1938년 중국 장쑤성(姜蘇省)에서 병사하기까지 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담았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보안회 활동을 했으며 1902년 이상재, 민영환, 이준 등과 개혁당 조직운동에 참여했다. 또 1908년엔 안창호, 이동녕 등과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만들기도 했다. 1911년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시키기 위해 이른바 데라우치 암살음모사건을 날조,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체포하고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당시 선생도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6년형으로 감형됐고 4년간 복역하다가 1915년 2월 석방됐다.

1920년대에 들어 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주로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편강렬, 남정 등과 함께 의성단을 조직해 일제 중요인물 및 시설을 암살, 파괴하도록 지휘했다. 이어 1925년엔 오동진, 김동삼 등과 의성단, 길림주민회, 광정단, 대한군정서를 통합해 정의부를 조직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했다. 1930년대엔 상해로 건너가 광복운동에 전념했으며, 한때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이처럼 선생이 평생토록 전개한 수많은 항일구국 투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킨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인에서 임금까지 전국민이 하나되어 뭉칠 수 있는 최초의 범민중운동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국채보상운동의 가장 큰 역사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비록 일제 통감부의 탄압 책동으로 끝내 좌절되고 말았지만 그 정신은 3·1운동,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광복후 국산품애용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지금 우리 경제는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서 다시금 외채로 인한 위기를 겪고 있다. 이번 대구라운드를 통해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시민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정신이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세계 시민이 외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정신적 기반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해 본다.

조항래·평택대 교수, 피어선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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