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돈선생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입력 1999-10-06 14:53:00

서상돈(세례명 아우구스티노)은 1850년 음력 10월 17일 김천 마잠(현재 김천시 지좌동)에서 부친 서철순과 모친 김아가다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서철순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다 상주 청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10세이던 서상돈은 어머니와 함께 외가가 있는 대구 달서구 세방골로 왔다. 대구 천주교회 원로회장이던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조부)와 외사촌형인 김종학 등 주위 신자들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 훗날 낙동강 배편을 이용하여 종이와 기름장사를 해 거상이 됐다.

큰 재산을 모은 뒤에도 근검절약 정신이 철저한 그는 절대 쌀밥을 먹지 않았으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힘을 썼다. 봄, 가을에 곡식 창고 문을 열어 배고픈 이들에게 수백석을 나눠주었다. 그러던 그가 1913년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대구의 수많은 걸인들이 상여행렬을 따라가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서상돈은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했을 뿐 아니라 당시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 잡기 위한 애국 운동에도 일찍이 참여했다. 1896년 7월 서재필을 중심으로 창립된 독립협회에 참여, 재무부장으로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또 1906년 1월 김광제와 함께 대구광문회를 조직해 신교육을 위한 교과서, 계몽잡지, 신문, 교양서적 등을 발간했다. 한편 일제의 강압적 차관정책으로 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놓였을 때인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회 특별문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부사장이던 서상돈은 2천만 국민이 3개월간 담배를 끊어 모은 돈으로 국채 1천300여만원을 갚아 국권을 되찾자는 국채보상운동 건의서를 전격 발의했다. 그러자 함께 있던 문회 사람들이 적극 찬동, 김광제를 비롯한 회원들이 2천원을 갹출했다. 그리고 20일 후인 1907년 2월 20일 대구성 밖 북후정에서 최초의 군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대회에는 각계 각층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수백원을 모금하게 됐다. 이에 앞서 서상돈, 김광제 등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할 단체로 대구국채담보회를 설립, 대구 서문밖 달서교 부근에 있는 수창사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했다. 또 1907년 2월 23일 대구 남일동 부인 7명은 패물헌납보상운동을 폈다. 이들은 "남정네가 담배를 끊어 모은 돈으로 국채보상을 한다는데 내조의 의무가 있는 여자들도 국민된 의무로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며 취지문을 공포했다. 운동이 더욱 확산되자 대구 기생들도 의연금을 냈다. 운동의 뜻이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경향시보 등 전국 신문을 통해 알려지며 국채보상운동은 서울, 평양, 부산, 의주 등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초의 전국적 민중애국운동인 국채보상운등은 일제의 악랄한 탄압과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방해로 끝을 맺지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 운동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흩어졌던 국민들의 힘을 결집시키고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민족의 역량을 축적시켰다. 또 대외적으로 모든 국가들에게 한국인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됐다. 아울러 국채보상운동을 시발로 이후 독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 끊임없는 애국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90여년전 국채보상운동은 끝난 것이 아니다. 당시의 실패를 거울삼아 새로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켜 시작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우리는 서있다.

마백락·천주교 영남교회사 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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