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사회체제가 바뀌는 과정

입력 1999-10-01 00:00:00

현직 판사가 '남북한 함정들이 연평도 근해에서 맞부딪친 〈서해교전〉은 한국 정부가 조작한 사건'이라는 요지의 글을 컴퓨터 통신에 올린 일은 우리 사회에 작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법관들은 사회 질서의 궁극적 수호자들이다. 현직 법관이 대학가의 반체제 학생 운동권에서 나돈 어리석고 불온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수사가 시작되자, 그는 누가 자신의 이름을 도용했다고 발뺌을 했는데, 그의 얘기는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판사가 거짓말을, 그것도 곧 드러날 일에 대해서, 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어이가 없어졌다.

이번 일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들은 법관의 임용 절차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자격이 없는 사람이 판사가 된 것은 법 조문들만 달달 외운 사람들을 법관들로 뽑는 고시제도 때문이니, 법관 임용 절차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는 대표적이다. 일리가 있는 진단이고 처방이다. 그러나 그런 반응들은 이번 일에 담긴 중요한 함언 하나를 놓쳤다. 이번 일은 새로운 세대가 우리 사회 체제를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자연히, 우리 사회는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실무를 맡은 사람들은 대체로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그들은 당시 우리 사회를 짓누른 전제에 저항할 길을 모색했고, 그 과정에서 전제적 정권만이 아니라 우리 체제 자체에 대해 비판적이 됐다. 그래서 운동권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품었고 마르크스주의의 틀로 이 세상을 살피고 사회민주주의적 정책들을 지지하게 됐다. 지금 그들은 우리 체제를 실제로 움직이는 자리들에서 일하고 있으며, 비록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우리 체제에 비판적인 그들의 태도는 차츰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그들은 체제를 공격해서 허물려다 실패했지만, 이제 체제 안에 들어와 체제를 자신들의 뜻에 맞게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정권이 바뀌면서 문득 증폭됐으니, 현 정권은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젊은이들을 체제의 핵심으로 나르는 수레 노릇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은 여러 가지 변화들을 불러 왔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이런 급격한 세대 교체일 것이다. 정치 분야에 '젊은 피를 수혈한다'는 목표를 내세운 여권의 신당이 세워지면, 변화는 더욱 빠르고 깊어질 것이다.

물론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사회에 참여한 뒤에도 모두 급진주의자로 남는 것은 아니다. 현실과 만나면, 상아탑의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며 품었던 생각들은 바뀌게 마련이다. 특히 유모차 속의 아기들은 혁명가들을 소시민들로 만드는데 효과적이다.

그래도 젊었을 때 형성된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바뀌기 어렵다. 이 사실은 사회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새로운 세대에 의해 우리 사회가 크게 바뀌는 과정이 이제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해 사회가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앞선 세대들이 그들에게 조언하거나 간섭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구현한 우리 체제에 애정과 자부심을 지닌 세대들에겐 그런 체제에 비판적인 세대를 지켜보아야 할 책임도 있다. 보기에 따라선 아주 작은 일인 현직 판사의 부적절한 처신을 우리가 상징적 사건으로 보고 깊이 생각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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