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가난한 자의 삶의 공간

입력 1999-09-15 14:12:00

서구에서 아파트라는 건축 형태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그것은 본래 산업화의 진전으로 대거 도시로 몰려든 집 없는 저소득 계층에게 공동주택을 마련해 준다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삶의 공간은 가난한 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도심지의 집값은 너무나 비싸서 가난한 자들은 길거리로 내몰릴 수 밖에 없었다. 이들 저소득 계층은 삶의 공간을 찾아 버려진 도심지의 하천변이나 구릉지대로 몰려들었고, 거기에 들어선 판자촌은 통풍도 안되고 햇빛도 안드는 아주 열악한 공간이었다. 모든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돌볼 책임이 있는 국민의 정부가 그것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파트는 이들 가난한 자의 요구를 고려한 공공 임대주택의 대량생산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건축 형태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거의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된다. 도심지에는 무허가 건축으로 이루어진 달동네 판자촌이나 하천변 판자촌들이 출현하였고, 정부는 뒤늦게 도시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할 목적으로 도시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공공 임대주택으로 아파트를 짓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서구와 달리 아파트가 도시민들에 의해 핵가족 중심의 생활공간으로 선호되면서 대단위 아파트단지나 아파트도시들이 전통적인 삶의 공간을 급속도로 대체하고 있는 특이한 양상을 보여주고는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주택개발공사와 도시개발공사를 통해 공공 임대아파트를 지어주면서 입주자들에게서 자신의 삶의 공간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버렸다. '임대주택법'과 '공공임대주택 관리지침'에다가 입주자가 권리행사를 할 수 없도록 못박아 버린 것이다.

국민의 권리를 위임받아 행사하는 정부가 이들 입주자의 권리행사를 제한했다는 것은 사실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수도 있는 중대 사안이다. 집 없는 가난한 자도 집 있는 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의 공간을 스스로 관리할 권리를 가진 국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 정기 국회에서 임대주택의 입주자에게도 주민자치권의 일부를 인정하는 법개정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권한부여가 주택관리에 대한 심의·결정권이 아니라 임대사업자와의 합의 수준에 제한될 것이라 한다. 만일 그것이 정부가 임대주택의 주인이기 때문에 입주민은 주택관리와 운영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없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런 정부가 국민이 주인인 민주국가에서 스스로를 국민의 정부라고 자칭하기에는 낯부끄러울 것이다.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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