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이었다. 그때 나는 '페드라'를 준비하고 있었다.연습이 50일 이상 계속되면서 나는 지쳐 있었고, 벗어나고 싶었다. 늘 영화를 함께 보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영화 좀 보여줘"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메트리스'가 어떠냐"고 했다. 그게 요즘 영화의 메인 디시라고. 나는 그게 어떤 영화인지 몰랐다. 나는 "그거 '메트릭스'야?"라고 묻는 심란한 종족이었으니까.
언제나처럼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영화가 없다면 얼마나 심심할까? 그러나 동시에 어떤 종류의 열패감도 밀려왔다. 그런데, 내가 하는 연극은 왜 그렇게 부담스러운 거지? 관객들은 위치도 잘 모르는 극장에 가서 영화의 몇 배나 되는 입장료를 내야 하고, 주말에 2회, 월요일엔 쉬고…. 시간표도 까다롭지. 라이브라는 기쁨으로 상쇄하기엔 연극이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수공업 같기만 했다.
그 영화는 우리나라에선 꿈에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메커니즘을 동원한 온갖 테크닉으로 처음부터 혼을 빼놓았다. 게다가 배우들은 희극이나 비극을 '연기한다'는 것 이전에 미래에 존재하는 종족으로서의 '필(feel)'을 전해주고 있었다.
초 단위보다 빠른 시간으로 달려가는 미래의 시스템 속에서 무엇인가가 나에게 와 부딪혔고, 내 안의 줄이 툭, 하고 소리를 내며 끊어지고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데 나는 고리짝 그리스시대 이야기를, 그 많고 벅찬 대사들을, 그리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야기를, 그것도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발음하고 있다니.
연습으로 지쳐있던 마음을 위로하려던 계획은 소용없어졌다. 내가 하는 연극이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 정말 연극의 효용성은 무엇인가, 하는 자의식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어떤 영화가 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늦은 속도의 내 연극이,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하는 연극이 존재하는 거야, 금속성의 문명 속에 용해돼 버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추운 마음을 서로 부축할 수 있기 때문에, 라고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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