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내 최장기수 권희로(權禧老·71). 무엇이 권씨로 하여금 최장기수란 굴레를 쓰게 만들었는가.
일본인의 한국인 차별에 대항, 야쿠자 두명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돼 장장 31년 7개월이라는 기간을 차디찬 일본 형무소에서 보내고 7일 석방되는 권희로.
권씨는 1928년 11월20일 일본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아버지 권명술씨와 어머니 박득숙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권씨의 고향은 부산 영도이며 어머니 박씨는 해운대구 석대동으로 18세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권씨와 결혼, 아들 희로와 풍자, 미현 등 2남1녀를 낳았다.그러나 희로가 네 살되던 해 목재하역 인부였던 권씨가 작업도중 사망하면서 권씨의 파란만장한 삶은 시작됐다.
이로부터 3년 뒤 어머니 박씨가 김종성씨와 재혼해 술장사를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권씨의 현재 성은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른 것이나 본인은 계속 권희로를 고집하고 있다. (고국에서는 원래 성인 권씨로 살게된다)
권씨의 일본생활은 차별과 멸시의 나날이었다. 당시만 해도 '조센징'이라는 놀림이 만연돼 있던터라 권씨는 심한 모멸감을 느끼며 자랄수밖에 없었다.
소학교시절 권씨는 어머니가 싸준 감자도시락이 일본인 학생에 의해 내팽개쳐진 것을 뼈아픈 상처로 지금까지 잊지않고 있다.
일본인의 차별과 멸시를 견디기 힘들었던 권씨는 소학교 3학년때 가출해 생업현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한국인으로서의 그의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취직을 위해 무려 여덟번이나 이름을 바꿔봤지만 번번이 탄로나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59년 일본인 아내 가즈코와 결혼했으나 8년만에 이혼하고 사업에도 번번이 실패, 항만노무자로 전전하다 누명을 뒤집어 쓰고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등 힘든 젊은시절을 보냈다.
권씨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권씨가 40살이던 68년 2월20일 시미즈시의 나이트클럽 밍크스에서 터졌다.
빌려쓴 돈을 갚으라는 야쿠자의 시비가 발단이 됐지만 "조센징, 이 더러운 돼지새끼"라는 폭언은 어린시절 일본인에게 당한 차별과 멸시를 기억하고 있던 그를 분노케 만들었다.
권씨는 갖고 있던 라이플 엽총으로 시즈오카현 야쿠자 두목과 그 부하에게 엽총을 발사,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살해 후 그는 차량을 이용, 현장에서 45㎞ 떨어진 시즈오카현 스미타쿄의 후지미야여관에 들어가 여관주인과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신문과 TV 등을 통해 민족차별문제를 일본내에 호소했다.
60년대 일본사회에 재일동포 차별문제를 극적으로 부각시켜 여론화한 최초의 사건이었으며 당시 모든 일본신문과 방송에 보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인질극을 지켜보던 어머니 박씨는 아들에게 한복 한벌을 건네주며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며 비장함을 보였다.
권씨는 체포된 뒤 여관주인인 모치즈키 히데코(61·여·현재도 같은 여관운영중)씨에게 여관비 대신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건네주었으며 이 시계는 그 후 여관측이 관광상품으로 여관입구에 전시, 관광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권씨는 일본 법정에서 72년 1심, 74년 2심을 거쳐, 75년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무기수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수감후 그의 삶은 오로지 어머니를 걱정하며 지내는 것이었다. 확정판결후 시즈오카 구치소에서 구마모토 형무소로 이감되면서 그는 "고령의 어머니가 면회오시기에 그곳은 너무 멀다"며 이감을 거부하기도 했다. 또 어머니가 있는 양로원으로 200여통의 편지를 보내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는 것과 함께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나 어머니 박씨는 평생을 아들 옥바라지를 하다가 지난해 11월 시즈오카 시립양로원에서 아들의 석방을 보지 못한 채 92세로 한많은 세월을 접어야 했다.
권씨는 수형생활 중 고국에 돌아갈 것에 대비, 한국어 공부 뿐만 아니라 한국지명과 도로, 시사용어 등 폭넓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한글을 배우기 위해 깨알같이 쓴 한글연습장과 그가 직접 쓴 한글발음기호표 등에서 그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한글쓰기 연습예문으로 "어머니 오늘도 하루종일 날씨가 더워서 고생하셨지요"라고 적는 등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뤄 그의 지극한 효심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또 31년이라는 수형생활 중 교도소내 노역을 통해 번 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 불우청소년들에게 써 달라며 사회단체에 기탁하기도 하는 등 어려운 이웃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그는 또 성실하게 수형생활을 한 반면 감방안에서도 줄기차게 '일본과의 전쟁'을 주장하는가 하면 단식투쟁까지 벌여 한 때 행형성적이 최하인 4등급으로 떨어져 석방의 길이 요원할 것처럼 보였다.
이같은 권씨에게 석방의 실마리를 열어준 것은 고국에서 재소자들의 교화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던 자비사 주지인 박삼중(朴三中·71·자비사주지) 스님을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삼중스님은 지난 90년 1월 재일거류민단 관계자로부터 무기수로 복역하고 있는 권희로씨 석방운동에 나서달라는 제의를 받은 뒤 권씨의 어머니인 박득숙씨를 만나고부터 본격적인 구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때부터 삼중스님은 한달에 두세번씩 교도소를 찾아 권씨의 교화에 매달렸다. 그러나 권씨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계속되는 한 나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감옥에서 일본과 전쟁을 벌이다 옥사하겠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던 석방운동에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 평소 교화사업으로 친분이 있던 정해창 전 법무부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스님이 벌이고 있는 권씨 석방운동을 거들겠다고 나서면서 시작됐다.
정전장관은 일본 법무성의 지인을 통해 스님과 권씨의 특별면회(원칙적으로 외국인 면회불가)를 주선, 장장 3시간동안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스님은 특별면회를 이용, 살아생전에 아들과 함께 조국 부산땅을 밟고 싶다는 어머니의 뜻을 전하며 이를 위해서는 모범적인 수형생활과 함께 고국행이 전제돼야 함을 집중적으로 설득했다.
그러나 권씨는 오히려 스님에게 "어머니의 뜻을 알겠지만 감상적인 생각때문에 전쟁을 포기할 수 없다"며 더욱 완강히 버텼다.
수십차례의 면회에도 조금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던 권씨에게 변화가 온 것은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접하고부터다.
지난해 11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권씨는 심경의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으며 "나는 자식을 못보고 가지만 내 자식만은 고향에 돌아가 편히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부디 불효를 저지르지 말라는 스님의 설득에 마음의 문을 열어 나갔다.
이후 계속된 스님과의 면담에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나타내면서 석방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같은 권씨의 뜻을 파악한 일본 법무성은 권씨가 고령인데다 일본내 최장기수라는 부담감을 의식, 그의 가석방을 적극 검토하게 됐으며 마침내 지난 6월 7일 후견인인 박삼중 스님에게 일본 방문을 요청했고 이날 석방추진 계획을 밝히며 석방 조건으로 △가석방 즉시 한국으로 간다 △다시는 일본땅을 밟지 않을 것 △일본에 대한 부정적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자필 서약서를 조건으로 제시했다.일본 법무성은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복역한지 24년만인 지난 6월 권씨를 극비리에 도쿄 후추형무소로 옮기면서 권씨의 석방은 기정사실화 됐다. 마침내 지난 8월 후추형무소소장으로부터 9월 7일 석방 날짜를 통보받으면서 10년만의 석방운동이 결실을 맺음과 동시에 31년 7개월의 수형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극적인 순간이었다권씨는 7일 오전 6시 후추형무소를 나와 삼중스님이 준비한 한복으로 차려입고 어머니 박득숙씨의 유해를 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오면서 한많은 일본생활을 뒤로한 채 새 삶을 살아가게 된다.
권씨는 이미 고국에 돌아오면 삼중스님과 힘을 합쳐 복지법인을 설립, 고국내 재소자들과 외로운 노인들, 불우청소년들을 위해 나머지 인생을 바칠 것을 다짐한 바 있다.
권희로는 일본속에서 당한 억압과 핍박 등 민족차별에 저항했으며 그 방법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양식으로 나타냈다.
김의 전쟁이 시작된지 31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은 상존하고 있다. 이같은 민족차별이 계속되는 한 제2, 제3의 권희로 사건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권희로씨 석방운동에 지대한 기여를 한 삼중스님은 "한 사람의 일생을 이처럼 처절하게 망가뜨린 민족차별이 근절될 수 있도록 권씨 석방이 한·일 양국민의 의식을 성숙시키고 나아가 두나라간 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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