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향토출신 재일교포들 (5)-이진우사장

입력 1999-08-27 14:00:00

1988년 가을, 서울 올림픽 개회식이 화려하게 펼쳐지던 그날, 관중석 한켠에 자리잡은 한 재일교포 노신사는 감격스런 표정으로 세계 각국 선수단이 입장하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와 다양한 직업전선을 거쳐오는 동안 온갖 민족 차별을 경험했던 그 노신사는 회사 경영의 편의성을 위해 일본인처럼 행세하며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 보고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텅빈 관중석에 한참 동안 앉아 있던 그는 지금부터라도 당당하게 한국인임을 밝히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한민족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서울 올림픽을 통해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굳힌 것이다.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일본사회에서 명망있는 재일교포 기업가로 우뚝선 마스타(益田)상사 주식회사 사장 이진우(李震雨·79)씨. 도쿄 번화가에서 약간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 그의 사무실 겸 자택 응접실은 그의 검소한 성품을 느끼게 했다. 경북 영일군 송라면 중산리가 고향인 그는 당시 서울 올림픽 후원금으로 2억5천만원을 쾌척했다. 부모로부터 받은 돈 5엔과 편도 차표 한 장만 손에 쥐고 일본에 온 19세의 젊은이가 고향을 떠난지 50년만의 일이었다.

재일민단 조직내에서도 각종 성금 모금 행사에는 빠지지 않는 그는 87년 민단을 통해 올림픽 후원금 1억원을 희사했고 88년에는 직접 서울을 방문, 올림픽을 참관한 뒤 1억5천만원을 더 내놓았다.

일본 파친코 업소에서 사용하는 경품(景品)을 파는 사업으로 연간 3천억원의 매상을 올리는 그는 같은 업종의 개인기업 가운데 일본 최대 규모이다.

지난 94년 대한적십자사의 사업을 위해서 5천만원을 내놓았던 그는 지난 5월 평화통일을 위한 복지기금으로도 2천만원을 냈다.

"내 평생 조국을 위해 보람된 일을 별로 한적이 없으면서도 일본정부에는 많은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우리 민족을 위해서도 공헌하고 싶어 후원금을 내고 있습니다"

1920년 영일군 보경사 부근 마을에서 가난한 농가의 7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송라보통학교를 3년간 다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삼촌집이 있는 봉화군 재산면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위로 형들에 밀려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못꿀 형편이었다. 이때 그는 어린 마음에도 공부할 수 있는 길은 사촌형이 살고 있는 일본으로 떠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을 굳혔다.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연락선을 탔으며 도쿄에 도착했다. 우에노(上野)의 철도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집으로부터 지원은 받을 수 없어 고학을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하는 우유 배달, 신문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학교도 졸업했다.

한때는 세이부(西武)철도회사에 취직하기도 했으나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사촌형과 함께 식품공장을 차리고 당면 등을 만들어 팔았다. 주식(主食)도 제대로 못사 먹는 시절에 부식이 팔릴 리 없었다. 다시 고무풍선 만드는 회사에 취직, 오토바이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려 각 지방으로 물건을 배달하며 팔기도 했다.

"어디를 가나 조센징(朝鮮人)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울분을 삼키며 일본인인 것처럼 가장하고 장사를 해야했지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재일교포들은 다 마찬가지였습니다"그뒤 친구가 경영하는 파친코점에서 일하다가 창업의 기초가 되는 경품 가게를 시작하게 됐다. 이 무렵 많은 한국인 교포들이 파친코 장사를 시작해 엄청난 주문이 밀려들었고 영업이 끝나는 새벽 2, 3시까지 트럭 한대로 납품과 수금을 하며 밤낮없이 뛰었다.

"젊은 시절에는 사업 수완도 없어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실성 하나만으로 어려움을 극복했지요. 혼자서 10여년 동안 계속해서 정신없이 뛰다보니 결혼도 늦어졌어요. 36세나 돼서야 중매로 청도군 출신 여성을 만났습니다"

이윽고 창업의 기반을 닦은 그는 경주이씨 익제공파의 익(益)자를 따서 회사이름도 마스타(益田)상사 주식회사로 지었다.

"공부하려고 일본에 왔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한 셈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재일교포 2·3세들의 조국관이 바뀌고 있어 아쉬움을 느낍니다. 우리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앞으로 50년 후 재일교포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지 우려됩니다" 이 사장의 그런 심정은 동경한국학교 설립 당시 1억원을 내게했고 한국교육재단에도 5천만원을 내놓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한일양국 적십자사와 아시아 각국 출소자들의 사회복귀 사업에도 협력하고 있다. 92년 일본 적십자사 도쿄지부에 300만엔 기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7년째 매년 300만엔씩을 적십자사 복지사업을 위해 내놓고 있다.

"일본 적십자사에도 후원하고 참여하는 것은 재일교포의 이미지를 위한 민간외교이지요. 해마다 우리 민단이나 조국에 기부하는 내용을 일본 세무당국이 지켜보고 있는데 일본 지역사회에도 적합한 금액의 기부를 해야만 균형이 맞게 됩니다" 80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그는 재동경 경북도민회 부회장, 한일우호협회 고문, 지역민단 고문을 맞는 등 각종 모임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장기적인 일본의 경제 불황 탓에 파친코 업계도 영향을 받아 마스타상사의 연간 매상고가 지금은 2천억원대에 머물고 있습니다. 단골 거래선은 약 170개 업소인데 제품의 질을 높이고 납기를 엄수해 이들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60년 전 차표 한 장 들고 고향을 떠났던 그도 지금은 1년에 한두번은 꼭 영일군 송라면 고향을 찾고 있다. 그는 어릴 때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불어 등교길에 하천을 건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시절을 회상하며 동네 앞에 다리를 놓는 자상함을 보이기도 했다.

朴淳國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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