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을 위한 입법을 서두른다고 하더니 어느 사이에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젊은 피를 수혈하여 신당을 만들겠다고 야단들이다. 수혈을 하면 중병을 앓고 있는 정치가 당장 생기를 되찾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다. 수혈은 원래 질병의 치료 과정에서 모자라는 피를 얼마나 보충하는 보조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질병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부위를 어느 만큼 도려낼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아니하고 수혈부터 하겠다니 걱정이 앞선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정치계에서는 시민운동계에서 젊은 피를 얼마간 헌혈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듯 하다. 비교적 양심적이고 순수한 열정을 지닌 시민운동가들이 정치에 참여하여 혼탁한 정치를 정화하는 데 일조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가의 정치 참여를 무조건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권장하고 환영해야 할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이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에 적지 않은 고민이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정치상황을 돌아보면 몇몇 양심적인 인사들을 보충한다고 해서 정치가 쉽게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늘의 정치를 이처럼 혼탁하게 만든 장본인들이 그대로 정치판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잘못된 관행과 제도가 거대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마당에 약간의 젊은 피를 수혈한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정치파행의 일차적 책임을 져야할 그들이 책임을 통감하고 모두 물러나거나 뼈를 깎는 아픔을 참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정치개혁은 요원한 일인 것 같다. 수혈은 그 다음의 일이라 생각한다.
정치활동이든 시민운동가든 모두 나라 잘 되자고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굳이 경계를 가를 필요야 없겠지만 정치가 그 나름의 할 일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민운동 또한 고유한 가치와 사명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시민운동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최근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기대 속에는 잘못된 관행과 제도를 바꾸고, 정치가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이끌어 가는 압력집단으로 역할해 주기를 바라는 여망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운동 고유의 가치와 사명에 충실하면서 운동을 더욱 활성화시켜 나가는 것이 정치참여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한다.
우리 사회의 시민운동이 90년대 이후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시민의 참여가 저조하고 사회의 이해가 미약하여 활동기반이 매우 취약한 실정이다. 이러한 때에 무계획한 수혈바람에 휘말려 섣불리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시민운동으로 다져진 아까운 인재마저 혼탁한 정치판에 오염되기 쉬울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기반이 튼실하지 못한 시민운동을 더욱 위축시킬 것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정치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그들의 명분과는 달리 시민운동을 정계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된다면 시민운동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도덕성과 순수성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이것은 그들의 정치적 기여에 비할 수 없는 커다란 사회적 손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민운동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는 인사들의 정치 참여는 더욱 신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이미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시민운동의 앞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