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노모도 조선인 학살사건

입력 1999-08-16 14:54:00

지난 1926년 1월3일 일단의 일본인들이 소방용 갈고리 등으로 조선인 노동자 2명을 살해한 뒤 거리로 끌고 다니다 사흘간이나 노상에 사체를 유기했던 잔혹한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키노모도(木本)사건'으로 불리는 이 학살사건은 그동안 일본인들의 사실왜곡과 은폐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얼마 전 한 재일교포 역사학자의 끈질긴 집념끝에 그 진상이 밝혀졌다.

현재 일본 오사카(大阪)시에 있는 인권박물관은 8.15를 즈음하여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의 추모비를 건립하는 회'라는 긴 이름을 가진 모임이 주관한 '키노모도(木本)조선인 학살사건' 기획 자료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 전시회는 아직도 사실을 은폐하고 사과하지 않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일본 당국의 처사를 바로잡고, 경북 경주시 부근으로 추정되는 희생자의 유족을 찾아 내기 위한 목적으로 오는 29일까지 열리게 된다.

지역 주민들과 일본 재향군인회원, 소방원 등에 의해 집단으로 자기방어라는 명목으로 저질러진 이 범죄는 그 잔학성 때문에 '축소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으로도 불리고 있다.

진상이 뒤늦게 밝혀졌으나 해당 지역 행정 당국은 아직도 사죄는 커녕 잘못된 시사(市史) 기록의 완전한 정정과 자료 공개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오사카 부근 미에(三重)현 쿠마노(熊野)시는 사건 당시에는 키노모도 지역으로 불렸는데 그곳에서 터널 공사장 노동자로 일하던 사건 당시 25세의 경북 경주출신 이기윤(李基允)씨와 29세의 부산 출신 배상도(裵相度)씨 등 2명이 일본인 집단에게 무수히 칼에 찔리고 소방용 갈고리에 찍혀 참혹하게 학살됐다.

당시 키노모도 부근에는 도로터널 공사를 위해 건너 온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집단으로 살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외출나온 조선인 노동자 1명이 사소한 일로 그 지방 일본인이 휘두른 일본도에 중상을 입었다. 주민들 사이에는 '조선인들이 복수하려고 몰려온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다음날 재향군인회원과 소방원을 중심으로 한 주민들이 소방용 갈고리, 일본도 등을 소지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작업용 숙사를 습격했다.

조선인들은 산속으로 달아나 숲속에서 일본인들과 대치했다. 이 과정에서 이기윤은 조선인 가족들이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산쪽이 아닌 시가지 쪽으로 향해 달려나가 일인 집단과 정면대결을 시도하다가 학살된 것이다. 부산 출신의 배상도씨도 이기윤씨에 뒤이어 거리에서 학살됐다.

한편 산속으로 달아났다가 일인들에게 포위됐던 조선인들에게서도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아직도 당국은 자세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쿠마노(熊野)시 백년지 등 일본의 각종 기록에는 '난폭하고 불량한 조선인들의 집단폭력에 주민들이 애향심을 발휘해 맞선 방어행위'라는 일방적인 입장에서 정리.기술됐고 세인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졌다.

그후 우연히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진상이 왜곡된 채로 남아 있다는 증언을 들은 재일교포 역사학자 김정미(金靜美.50)씨의 끈질긴 자료 발굴 결과 일본인 집단에 의한 학살사건임을 밝혀냈다.

이 연구를 계기로 재일교포와 양심적인 일본인들로 구성된 '키노모도에서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 추모비 건립회'가 오사카에서 결성됐다. 이 모임의 회원들은 두번 다시 이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지난 94년 추모비를 건립했다.

또한 학살된 부산 출신 배상도씨의 유족을 찾아내 함께 사고 현지를 방문하고 행사에 참가 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경주 출신이었던 이기윤씨의 유족을 찾기 위해 이들은지난 96년 7월까지 두번이나 경주를 방문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이들은 학살 주모자들을 오히려 두둔하는 내용으로 기술된 쿠마노(熊野)시의 시사(市史)를 정정할 것과 유족에 대한 당국의 사과도 요구했다. 이미 지난 92년 시의회에서 결의됐던 추도비 건립보조비가 아직도 집행되지 않았음이 일본 언론을 통해 밝혀졌으나 시 당국은 지금도 유족에 대한 사과와 시사의 정정을 거부하고 예산집행에 대해서도 애매한 답변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당시에 촬영된 거리 모습 등 다양한 사진과 사건 개요, 각종 증거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재일교포 문공언씨는 "이번 전시장에는 두 사람의 묘비도 옮겨져 있는데 일본인들이 사건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두 사람의 묘석을 현장 근처 사찰에서 무연고 묘지로 옮겼었는데 묘비문에도 센징(鮮人.조센징 준말)이라고 새겨 차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범죄에 가담했던 민간인들은 모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군인 또는 군속의 신분으로 한반도 등 동남아 각지로 투입됐는데 그들의 포악한 면을 봐서 더욱 추악한 범죄를 저질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전시회를 둘러본 한 재일교포는 "당시에도 일제의 식민 지배에 의해 농토를 빼앗긴 젊은이들이 일본으로 끌려왔고 지금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심한 일본으로아시아 각국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흘러 들어오고 있어 키노모도 사건이 가진 의미는 결코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글.사진:오사카에서 朴淳國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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