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한 초등학교 과학 교실. 교사가 여학생들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주도권을 잡아라고 격려하고 남학생에게는 혼자만 떠들지말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감정 표현에 신경쓰라고 권유한다.
이웃한 핀란드의 뵌머러 마을. 인구 1만6천명의 작은 시골동네이지만 매년 'BRYT'(영어로 break 뜻) 프로젝트가 수행된다. '깨다'는 뜻을 지닌 이 프로젝트는 무엇을 깨라고 강요하는 것일까. 바로 '여성은 과학에 약하다' '여성은 기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과 '과학의 주역은 남성'이라는 신화를 깨고, 숨은 능력을 살려내도록 훈련시킨다.
15~18세 학생을 대상으로 한 BRYT 프로젝트는 기술체험과 직장체험으로 나눠지는데 여학생은 엔지니어·경찰관·트럭운전사, 남학생에게는 보육소 교사·간호사·요리사 일을 경험케한다. 이 프로젝트 이후 핀란드 여성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세계 각국이 과학사 속에서 잊혀진 여성 역사를 복구해내고, 여성과학인력을 발굴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서구에서는 70년대부터 '여성과 과학'에 관한 논의가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90년대에는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 과학사학과)교수는 "여성을 비과학적 존재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생물학적·사회적 결정론의 산물"이라는 비판의 잣대를 들이댄다. 즉 학문 특성상 과학을 성(性) 중립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과학도 사람이 하는 학문이기에 사회적 요소가 투영되면서 그 어느 분야보다 남성 독점이 심한 곳 중의 하나이다.
과학기술부(현 정보통신부 전신) 산하 연구개발정보센터의 과학기술인력 DB에 의하면 98년 3월말 현재 공공부문 연구소의 선임급 이상 여성인력은 전체의 5% 미만이고 공학을 전공하는 여교수가 전체 교수의 2%에도 채 못미쳐 과학기술분야에서 대표적인 남녀 불평등 사례로 꼽힌다.
"이런 불균등한 상태는 여성이 고도의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과학기술과 같은 전문직에는 부적합하다는 인식을 재생산함으로써 남녀 평등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고, 인재를 양성하여 세계시장에서 경쟁해야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엄청난 인력낭비"라고 홍승욱씨는 덧붙인다.
여성과학자들이 소중한 이유는 또 있다. 여성 과학기술자들은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여 남성이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지식형성에 기여하고,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수어 평등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
19세기 의사들은 여성의 월경을 병적인 현상으로 여겼으며 월경기간중에 지적인 활동을 피하고 누워서 쉬도록 하였다. 이에 반하여 여성의 월경경험에 대해 새로운 연구로 가벼운 운동과 일상활동을 권장하는 새로운 의학이론을 만든 사람은 남자 의사가 아니라 영국 여의사협회 크리스틴 머렐과 같은 페미니스트 의사들이었다.
또 남성이 여성보다 두개골이 크기 때문에 지능이 더 우수하다는 19세기 골상학의 뿌리깊은 이론을 부수어버린 사람은 런던 한 대학의 생물측정학 실험실에서 일하던 엘리스 리라는 여성과학자였다.
새 곤충 꽃으로부터 많은 것은 배운 미국의 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은 당시 아주 유익한 농약으로 남용됐던 DDT가 해충만이 아니라 먹이사슬을 완전히 파괴한다고 주장하며 사용금지를 주장하여 한동안 세계 생물학계에서 왕따당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카슨은 DDT가 자연을 완전히 말살시켜버린다는 침묵의 봄을 출간, 결국 케네디 대통령이 과학자문위원회로 하여금 살충제가 환경에 미치는 효과를 연구하게끔 만들었다.
침팬지나 오랑우탄과 같은 영장류를 실험실에서 관찰하지 않고 밀림의 이들생활에 직접 합류해서 영장류 이해의 새로운 인식을 제공한 사람은 제인 구달 같은 여성 영장류학자였다.
또 여성과학자 바버러 매클린톡은 독특한 관찰방법으로 6년간 옥수수 세포를 관찰한 끝에 점핑 유전자 가설을 만들어 생물학계에서 이단으로 불리던 그녀를 결국 노벨상 수상자로 만들었다.
이처럼 여성과학인력이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원천으로 인식되고, 과학기술의 민주화와 남녀 평등에 지렛대 역할을 하도록 요구받으면서 세계 각국은 여성과학인력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영국은 "여학생이 유소년기에 기계적 완구나 퍼즐을 그다지 갖고 논 적이 없는게 이후 여학생의 수학·과학 분야 진출의 걸림돌"이라고 파악한 후 WISE(Women Into Science & Engineering) GIST(Girls Into Science & Technology) 프로젝트, 여학생 별반(別班) 구성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여성의 과학기술 진출을 돕고 있다.
WISE 프로젝트는 기회균등위원회가 대영가스 등 대기업의 후원으로 84년부터 시작됐는데 일년 내내 6대 버스에 컴퓨터를 싣고 전국을 순회하며 이공계 직종에 대해 설명하고 또 실습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 여성기술자가 정기적으로 지역 초·중학교를 방문, 학생과의 대화를 통해 학생들에게 역할모델이 된다. 이 프로젝트 이후 공학 전공 여학생들이 7%에서 두배가 넘는 15%로 증가했다.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아이슬란드 5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로 이루어진 북구각료평의회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분야에 여성을 보내기 위한 진로지도 프로그램으로서 북유럽 파일럿 프로젝트(AVAA)도 시행됐다.
미국에선 80년대 이후 여성과 과학기술 관련 일련의 법률까지 만들어졌고, 퍼듀공대에서는 초중고등학교 여학생 프로그램을 갖고, 자연스런 견학기회를 제공한다. 이 대학에서는 선배-후배 여학생이 짝이 돼 정기적으로 만나 정보를 나누고 고충을 해소하는 '빅 시스터'(big sister) 프로그램, 여학생 진출기반 조성을 위한 산업현장 실습 프로그램, 여학생에게 지급하는 산업체 장학금도 지급한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 여성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1945년 해방당시 이공계 대학 여성졸업생은 단한명. 홋카이도 제국대학 이학부를 졸업한 김삼순 한명뿐이었다. 51년에는 서울대학에서 최초로 자연과학 전공 여성 5명이 배출된 이래 자연과학분야의 학사 중 여성비율은 46%로 매우 높아졌다.
그러나 여성인력은 몇몇 분야에 치중돼있고, 공학의 경우 학사는 5%, 석사 4%, 박사 2%에 불과하다.
이렇게 배출된 여성과학인력은 사회진출에서 콱 막혀 인재 양성과 수요창출의 불균형 현상이 심각해진다. 여학사 비율이 절반을 차지하지만 시험연구기관의 여성 연구원은 9.2%에 그쳐 과학기술계의 고용불평등 실상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9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서야 여성 과학기술인력의 양성과 활용에 관한 정책이 현 환경부 김명자 장관 등 몇명에 의해 추진되었다.
현대라는 문화속에 만들어진 현대과학이 모든 문화와 사회를 무력화하면서 많은 경우 우리사회의 남녀 불평등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기능이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되며, 페미니즘과 여성과학자들이 만나서 날카로운 비판자 역할을 할때 국내 과학기술도 한단계 더 도약할 것 같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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