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어거지 문화

입력 1999-07-01 00:00:00

◈어거지 비용

"자동차 대가리는 먼저 밀어넣는 놈이 임자다"는 말이 허용되는 사회, "어거지는 사촌보다 낫다"고 믿고 있는 사회, 그 사회는 분명 후진적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대개 법 지키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사회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회는 엄청난 어거지 비용을 물고 있음에도 모두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저혼자 편하려고 교통질서를 무시한 데서 오는 교통 혼잡 비용만도 한해에 자그마치 18조원(GDP의 4.4%)이나 된다. 물론 여기에는 도로율, 교통안전시설 미비 등 여러 요인이 겹쳐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우리 사회에선 어거지를 막으려 웬만한 거래에선 인감을 요구한다. 여기에 드는 비용만도 98년 현재 연간 1조4천억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노사 분쟁이나 집단이기주의가 부른 단체 행동에서는 법이나 협의가 도대체 필요 없다. 이렇게 곳곳에서 어거지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

경제분야에서도 어거지는 있다. IMF관리 위기를 부른 과잉시설, 과잉부채 과잉인원 등도 따지고 보면 어거지에서 출발한다. 증설해서는 안되는 데도 자존심 경쟁이나 정경유착 등 소위 믿는 데가 있어 어거지로 증설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엄연히 조세 법정주의를 채택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어거지인 소위 준조세가 연 12조원에 이르고 있다.

◈민주주의 후퇴 요인

정치분야 역시 어거지는 설친다. 김태정전법무장관 물의때 국민들은 분명 "갈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도 대통령은 여론조사라는 근거까지 대며 '양심적인 법률가'인 김전법무장관을 안갈아도 된다고 우겼다. 그런가 하면 서해교전으로 빚어진 햇볕논쟁에서 "햇볕정책은 재검토 되어야 한다"고 하자 대뜸 여당 고위층은 "그럼 전쟁을 하자는 말이냐"고 받아쳤다. 햇볕론과 그 반대론은 다같이 안보와 화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햇볕론은 화해에 더 중점을 두고 그 반대론은 안보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전쟁 운운…"하는 것은 어거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토론문화가 자라지 못하며 토론문화의 실종은 바로 민주주의의 고사(枯死)를 의미하므로 심각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외 우리는 흔히 정치적 합의를 해 놓고도 고위층의 한마디로 무산되어 버리는 낭비 역시 우리의 어거지 문화의 한 단면이다.

◈어거지의 실패

아시아 경제위기가 났을 때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아시아적 가치였다. 시스템위기론, 관리위기론,환경위기,외환(헤지펀드)위기론 등 여러 경제요인을 든 해설도 많았지만 아시아적 가치 혹은 신뢰의 위기, 문화의 위기 등 문화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학자도 많았었다. 더욱이 21세기의 지식사회나 정보화사회를 앞두고는 더욱 창의성 등 개인의 능력에서부터 다원성 등 국가 문화풍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적 요인에 각국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서도 여기에 발맞춰 "윤리가 경쟁력이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나 '문화에 발목 잡힌 한국경제'라는 책 등 문화와 국가발전과 관계된 비전문인들의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경제위기는 '어거지의 위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 우선 우리의 총 어거지 비용은 천문학적 액수일 것이므로 이래서는 국가가 경쟁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시스템적 측면에서도 어거지는 비록 개인의 효율은 높였을 지는 모르나 국가의 효율은 크게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즉 네거리에서 신호위반 하면 그 차의 효율은 높아지겠지만 다른 차는 밀리게 되어 전체 교통효율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같은 논리로 재벌은 살찌지만 국가경제는 멍들고 서울은 잘 나가지만 전국경제는 시들게 된다. 그리고 어거지는 네트워크가 적은 산업사회 시절에서는 성공을 거둘 수도 있겠으나 지금과 같이 네트워크가 진행된 정보화 사회에서는 엄청난 혼란과 비용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요소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개발초기 한때 어거지는 힘이 될 수 있었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성숙기에 들어선 지금에 와서는 분명 어거지는 독(毒)이다. 따라서 하루빨리 생활에서도 경제에서도 정치에서도 이를 버려야 한다. 선진국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 멀고도 험하며 또 경제 하나만으로는 안되는 종합적인 것임을 깨달아야 할 때이다.

〈서상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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