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옛 지도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어떻게 표시·표기하고 있는지는 단순한 학술적 자료나 일반인의 흥미 거리 수준을 넘는 중요성을 갖는다. 제작 당시의 제3자적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국경 문제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럽인들은 그같은 지도를 자의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중국 등 동양의 인식에 따랐을 터여서, 결국은 분쟁 당사자들의 인식을 증거하는 자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 알려진 영국 케임브리지대 소장 유럽 지도에 대한 조사(29일자 본지 2면 보도)는 사실상 정부 차원의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끈다. 개별 학자들에 의한 조사도 상당수 있었겠지만, 이번 조사는 영국 주재 우리 대사관의 총무처(당시) 주재관(현 행정자치부 최양식 국장)이 주도하고 이에 문화체육부 소속 학예연구관(김권구 현 국립대구박물관장)을 동참시켰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97년 10월 보고서가 제출된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지금에야 우연히 알려졌다. 정부가 중국과의 국경 분쟁을 어려워한 때문으로 보인다.
◈간도부문
우리측 지식인들이 방문할 때 중국인들이 지금도 많이 하는 관심 질문이 "통일이 되면 한국이 간도 반환을 요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이 문제에 그만큼 민감함을 반영하는 사례이다.
만약 일제 강점만 없었다면 간도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이미 한중 양국 사이에 중요한 논란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곳에는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해 살고 있었고, 일제 침탈 직전까지도 우리 관리가 파견돼 주민들을 통제하고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 이는 간도를 우리 땅이라고 간주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조 숙종 때(1712)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선을 책정하면서 "서쪽의 압록강과 동쪽의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한다"고 정함으로써, 토문강 이남인 간도 지역은 당연히 우리 땅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두만강과 토문강 사이 일대가 간도이다.
문제는 1880년대 들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청나라측이 '토문강'이 그 토문강이 아니라 두만강을 지칭한 것이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도 간도는 여전히 우리 땅으로 인식됐고, 통감정치를 시작한 일본까지도 1907년에 간도출장소를 둘 정도였다.
그러나 1909년 일본은 철도 건설권을 받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 주는 '간도협약'을 체결해 버렸다. 이것이 근세 들어 간도 문제가 물밑으로 잠적해 버린 계기였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많은 유럽 지도들은 간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함으로써 중요한 증거를 제시하기 시작한 셈이다. 특히 유럽의 지도들은 중국측 인식에 바탕하고 실측까지 거쳐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결국은 "중국 조차도 간도를 한국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간접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조사자들은 파악했다.◈동해표기
조사자들이 자료를 종합한 결과 내린 결론은, 동해의 표기가 '동해'에서 '한국해'로 바뀌었다가, 다시 '일본해'로 변했다는 것이다. 처음 사용되던 '동해'라는 말은 '중국의 동쪽 바다' 정도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관측됐다.
그러다 아시아에 대한 중국측 지리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았던 18세기 이후에는 거의가 '한국해' '한국만' 등으로 표기를 바꿨다.
다시 '일본해'로 변한 것은 19세기 들어 일본이 유럽에 많이 알려지기 시작한 탓으로 풀이됐다. 본래 '일본해'라는 명칭은 우리나라 쪽이 아닌 그 반대쪽의 시코쿠 부분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었음도 이번에 밝혀졌다.
◈한국의 명칭
유럽의 지도들은 13세기 이후 17세기까지는 우리나라를 Caoli, Caole, Cauli, Kaoli, Corey, Core, Coray, Corai, Coreer, Corea, Koree, Regno di Corai, Royaume de Coray 등으로 표기했으며, 18세기 이후엔 Coree, Corea, Korea 등으로 정착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한때는 중국음의 영향을 받아 '조숀'으로 나타내기도 했다.◈지형
16세기 말까지는 한반도가 아예 지도에 나타나지 않거나, 길쭉한 섬으로 표시돼 있다. 이런 현상이 17세기까지 지속되다 18세기 이후 모습이 제대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지명
'서울'은 17세기말 지도에서 '김기' '깅기타오' 등으로 표시돼 있다. 이는 경기도와 혼동, 이를 중국음으로 읽은 것으로 관측됐다. 그 후엔 '한칭' '한양' 등 표기가 사용됐으며, 19세기 말부터 서울(Soul, Syeoul, Seoul)로 안정되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 말기인 1930년대 이후엔 한때 '경성'을 일본식으로 읽은 '게이조'로 표시되기도 했다.
독도는 19세기 초엽부터 지도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이름이 'Hornet섬' 등으로 표시된다. 그러나 어느 지도에도 한국 땅이라거나 일본 땅이라는 표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朴鍾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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