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은 썩어야‥" 北 협박·회유

입력 1999-06-29 15:11:00

민영미(閔泳美·35·여)씨가 북한에 억류돼 조사를 받았던 장전항 인근 컨네이너와 금강산려관 두 곳의 당시 환경과 조사 분위기는 어땠을까.

민씨는 북한 조사관이 서류뭉치로 책상을 치고 '10년은 썩어야 한다'거나 '죽이기야 하겠느냐' 또는 '아들이 보고 싶지 않으냐' 하는 등 때로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때로는 회유하는 가운데 '사죄문' 작성을 강요당하다 닷새만에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사죄문'을 작성했다.

민씨에 대한 조사는 폭행은 없었으나 두 차례 실신하는 등 극도로 피곤한 가운데 진행됐고 민씨는 제공된 매끼 식사를 거의 먹지 못했다.

민씨는 그러나 22일 금강산려관으로 옮겨지던날 저녁에는 인근 온천장에 다녀왔다고 진술했다.

▲장전항 컨테이너(20일 오후 8시께∼22일 오후 1시)컨테이너 안에는 책상 4개와 의자 5개, 간이침대 1개가 비치돼 있었고 쌀밥과 사과, 음료수 등이 제공됐으나 민씨는 음료수만 마셨다.

21일 새벽 2시께 북한 조사관 3명이 들어와 '귀순유도' 발언을 시인하는 내용의'사죄문' 작성을 강요했으나 민씨는 "단순히 말을 걸었을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는 내용의 A4용지 2장 분량의 진술서를 세 차례나 작성했다.

조사관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왔느냐.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3년이고 10년이고 맛을 봐야 한다"고 위협하면서 서류뭉치로 책상을 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으나 폭행은 없었다.

이날 오전 10씨께 민씨는 컨네이너 옆에 있는 화장실로 가던 중 현대 직원들과 함께 승용차에 타고 있던 아들이 손을 흔들며 엄마를 부르는 것을 목격하고 만나게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민씨는 이날 하루 종일 조사받은 뒤 밤 10씨께 극도의 불안감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응급조치와 함께 링거주사를 맞고 다음날 새벽 1시 20분께까지 잤다.

민씨는 22일 오전 6시30분께도 가족생각을 하다가 또 쓰러져 응급처치를 받았다.이날 오전 민씨는 본인 및 남편의 학력과 경력, 직장, 가족사항 등에 대해 조사를 받았으며 본인의 신상과 가족사항은 물론 자신의 사회활동 등에 대해 소상히 답변했다.(북측은 조사장면을 비디오로 촬영)

▲금강산려관민씨는 22일 오후 1시께 금강산려관으로 이동해 25일 귀환때까지 3층 객실에 머물렀고 이날 저녁때는 인근 온천에 다녀왔다.

객실은 7, 8평 규모로 침대 2개와 의자 4개, 냉장고와 TV 등이 비치돼 있었고 내실 내에는 여자 2명(4명이 교대), 복도에는 남자 1명과 여자 2명의 감시원이 배치돼 있었다.

민씨는 이 곳에서의 매끼 쌀밥에 반찬 5가지 정도(생선튀김, 계란찜, 생오이, 김치, 고추장 등)의 식사를 제공받았으나 거의 먹지 못했다.

23일부터 24일까지 평양에서 왔다는 조사관 2명이 처음부터 다시 조사를 진행했다조사 내용은 △남한에서 누구의 지시를 받고 공작을 벌였는지 △가족사항, 학력과 경력, 직업 등 신상명세 △금강산관광중 환경감시원과의 대화 내용 및 저의 △귀순공작에 대해 △연설 경험 유무와 공산당에 대해 웅변을 해 볼 수 있는지 등이었다.

조사관들은 "앞으로 10년은 썩어야 하는데 죄를 인정하겠느냐"는 식의 위협을 가하며 조사를 진행했고 민씨에 대한 호칭을 '민영미씨', '영미씨', '동무', '아줌마' 등으로 번갈아 사용했다.

23일 조사는 오전 8시께 시작됐으며 조사관 2명은 "속 마음을 털어놓고 진실을 이야기하지. 핏줄을 나눈 조선사람인데 죽이기야 하겠느냐", "더이상 말하지 않으면 법대로 처리하겠다", "애기 아빠와 아들이 보고 싶지 않으냐" 등의 협박과 회유로 사죄문 작성을 강요했다.

민씨는 사죄문 작성을 거부했고 자정께 조사관 2명은 "오늘은 푹 자고 내일 다시 할테니 잘 생각해 보라"며 신문을 마쳤다.

24일 오전 9시30분께 시작된 오전 조사에서 북한 조사관들은 '사죄문' 작성을 요구했고 민씨는 계속 이를 거절했다.

점심식사 후 민씨가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북한 조사관은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히면 집에 갈 수 있다"고 회유했고 이날 오후 5시께 북한 조사관이 미리 준비해온 A4용지 2매 반 분량의 '사죄문'을 주며 "사죄문 초안이니 읽어보고 베껴 쓰라"고 강요, 민씨는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그대로 작성해 제출했다.

다음날인 25일 오전 7시께 북한 조사관 2명은 전날 작성한 사죄문이 잘 됐다며 말미에 작성일자(1999.6.24)와 작성자(민영미)를 쓰게 한 다음 무인, 서명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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