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 세상읽기-그림 로비 리스트 소동

입력 1999-06-29 14:26:00

한동안 이른바 '그림 로비 리스트'가 나돌아 떠들썩했다. 그 명단에 나타난 로비대상은 최고위층의 부인까지 망라돼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리스트가 아주 정교하게 꾸며져 있어서 얼핏 보면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어느 국회의원이 면책특권을 빌어 국회에서 문제를 삼기도 했다. 이 발언은 너무 경솔한 느낌이 들었다. 액면 그대로 사실이라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사리일 것이다. 이를 조사해 보니 근거없는 소문으로 밝혀졌다. 이번 조사결과만은 검찰의 수사를 믿어도 좋을 것으로 여겨진다.

내 친구는 외교관으로 평생을 봉직하다가 퇴직했다. 그는 영어를 아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늘 외교관들이 가기 싫어하는 아프리카와 중동지방에 발령을 받았다. 곧 프랑스어권의 외교관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하찮은 부탁을 해왔다. 나와 잘 아는 어느 화가를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그림 몇 점을 샀다. 나는 의아해 했으나 나중에 납득을 하게 되었다. 상사들에게 로비로 쓸 그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착하고 여린 중견 외교관이 생각다 못해 그림으로 로비를 벌이려한 것이다. 10년전의 이야기이나 관행이었을 것이다.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민심이 들떠 있을 적 마다 이런 의혹과 유언비어가 난무해 왔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허위인지, 믿거나 말거나 이런 말들이 떠돌았고 이를 틈타 그 제조공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데 우리나라의 경우 그 제조공장은 몇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태종은 동생과 반대세력을 꺾고 임금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태조는 이런 아들이 보기 싫어 툭하면 아무 말 없이 옛 고향인 금강산과 함흥쪽으로 가서 마음을 달랬다. 태종은 사자를 아버지에게 보냈으나 사자들은 태조의 행방을 쉽게 찾지 못했다. 그런데 사자를 찾아오는대로 죽였다는 그럴듯한 말들이 떠돌았다. 이것이 함흥차사(咸興差使)이다. 완전히 사실이 아니었는데도 지금까지 사실처럼 알고 있다. 세조도 무수한 살륙을 저지르면서 왕위에 올랐다. 특히 그 과정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성삼문 등 학사출신들을 죽였다. 신숙주는 학사들이 믿는 동료였다. 신숙주가 동지들을 배반해 잡혀가지 않고 돌아오자 그의 아내는 수치스러워 자살했다는 말이 돌았다. 사실이 아니었으나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전해진다.

현대로 내려와 보자.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많은 무리(無理)와 탄압을 가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많은 말들이 떠도는 속에 스위스은행에 몇억달러를 비밀로 빼돌려 놓았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돌았다. 5공정권이 출범할 때에도 너무 많은 무리수를 두었던 탓으로 많은 유언비어성이 떠돌았다. 그속에 전두환 전대통령이 위험한 사태가 일어나면 도망치려고 청와대에서 외곽지대까지 지하터널을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두 가지 말들이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데 이런 말들을 누가 만들어냈건 민중들은 믿으려 들었다. 그래서 그 증오심을 간접적으로 풀려했고 현실의 불만을 '카타르시스'하려 했다. 한편으로 정치세력들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 제조공장을 알아내기는 힘들지만 민중들이 믿어주지 않으면 자연 소멸되고 만다. 현대는 과학과 정보의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헛소문에 장단치지 말고 좀 더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사리를 판단해 대처해야할 것이다. 그런 토양위에서 참된 민주의식이 성장하고 바른 개혁이 이룩될 것이다. 다시 말해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불평불안의 시대는 사라져야 한다. 그 당사자는 이런 토양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건전한 시민사회는 이런 바탕위에서 이룩된다.

이이화〈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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