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1876~1914)은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광복회에 의해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그를 국어학자로 알고 있을 뿐, 독립운동가인줄 아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이 기회에 그가 독립운동가로 인정되는 이유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일제에 의해 우리 나라가 강점되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기 시작한 때는 1905년, 즉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잃을 무렵이었다. 설마 했다가 눈앞의 현실로 깨닫게 된 것이다.
국가를 되찾을 수는 없을까? 민족지성들은 고민 끝에 국가를 잃더라도 민족만은 보존하자고 방향을 가늠했다. 왜냐하면 민족만 있으면 이를 바탕으로 다시 국가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사, 민족종교 및 국어야말로 민족혼을 담아둘 적절한 그릇이라고 판단하였다.
박은식과 신채호가 민족혼을 역사에 담아 두려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 역사관을 '국혼적 역사관'이라 일컫는다. 이를 부수고자 일제는 식민사관을 내세웠다. 또 나철이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로서 민족혼을 담아두려 했던 것도 역시 그러했다.
때문에 일제는 이를 두드려 부수고자 미신타파운동을 벌였다. 그 본색을 깨닫지 못한 일부 종교계가 여기에 앞장서 나가기도 했고, 그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주시경도 그러한 차원에서 국어에다 민족을 담아두려 했다.
우리말이 사라지면 민족을 보존할 수 없고, 국가를 되찾을 바탕도 없어진다. 그래서 그는 대종교로 개종하면서까지 국어연구와 보급운동에 매달렸다. 광복 직전, 대만의 일본어 보급률이 90%에 이르렀지만, 한국에서는 19%에 그쳤다. 주시경의 노력도 여기에 크게 기여했다.
국가를 되찾는 길이 민족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여기에 한 몸을 던진 주시경. 짧고도 짧은 38년 생애가 바로 독립운동 그 자체였다. 그의 활동을 음미하다가 문득 고관 부인의 밍크 코트니 검찰의 파업유도 의혹이니 하는 소식들을 대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차이를 빗대어 본다면 지나친 일일까?
〈안동대 교수·한국사〉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TK를 제조·첨단 산업 지역으로"…李 청사진에 기대감도 들썩
민주 "김민석 흠집내기 도 넘었다…인사청문회법 개정 추진"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