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말과 민족혼

입력 1999-06-28 14:09:00

주시경(1876~1914)은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광복회에 의해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그를 국어학자로 알고 있을 뿐, 독립운동가인줄 아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이 기회에 그가 독립운동가로 인정되는 이유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일제에 의해 우리 나라가 강점되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기 시작한 때는 1905년, 즉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잃을 무렵이었다. 설마 했다가 눈앞의 현실로 깨닫게 된 것이다.

국가를 되찾을 수는 없을까? 민족지성들은 고민 끝에 국가를 잃더라도 민족만은 보존하자고 방향을 가늠했다. 왜냐하면 민족만 있으면 이를 바탕으로 다시 국가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사, 민족종교 및 국어야말로 민족혼을 담아둘 적절한 그릇이라고 판단하였다.

박은식과 신채호가 민족혼을 역사에 담아 두려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 역사관을 '국혼적 역사관'이라 일컫는다. 이를 부수고자 일제는 식민사관을 내세웠다. 또 나철이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로서 민족혼을 담아두려 했던 것도 역시 그러했다.

때문에 일제는 이를 두드려 부수고자 미신타파운동을 벌였다. 그 본색을 깨닫지 못한 일부 종교계가 여기에 앞장서 나가기도 했고, 그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주시경도 그러한 차원에서 국어에다 민족을 담아두려 했다.

우리말이 사라지면 민족을 보존할 수 없고, 국가를 되찾을 바탕도 없어진다. 그래서 그는 대종교로 개종하면서까지 국어연구와 보급운동에 매달렸다. 광복 직전, 대만의 일본어 보급률이 90%에 이르렀지만, 한국에서는 19%에 그쳤다. 주시경의 노력도 여기에 크게 기여했다.

국가를 되찾는 길이 민족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여기에 한 몸을 던진 주시경. 짧고도 짧은 38년 생애가 바로 독립운동 그 자체였다. 그의 활동을 음미하다가 문득 고관 부인의 밍크 코트니 검찰의 파업유도 의혹이니 하는 소식들을 대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차이를 빗대어 본다면 지나친 일일까?

〈안동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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