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 금융위기가 닥친 이유를 알려면 먼저 동남아국가들이 지난 10여년간 빚잔치 속에 일궈온 고도성장의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 원인 중 하나로 지난 85년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이른바 G5가 체결한 '플라자협정'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대일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이 달러에 대한 엔화 절상을 강요한 것이다. 엔화 강세로 일본내 생산 단가가 치솟아 수출 전선에 타격이 예상되자 일본은 동남아권에 노동집약적 제조업을 진출시키는 동시에 달러를 투자하기에 이른다그러나 90년대 초반 일본이 대아시아권 투자를 멈추자 동남아 국가들은 해외 자본에 대한 장벽을 허물고 직접 달러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태국은 93년 기업의 해외 차입을 허용하는 등 외환거래를 자유화했다. 달러에 대한 국내 이자율을 미국보다 5~6배 높게 유지하는 한편 해외투자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달러당 25~26바트로 환율을 고정시켰다.
이에 대해 IMF와 세계은행 등은 '금융시장의 장벽을 없앤 모범적 사례'라며 부추겨 세웠고, 이 결과 외환 유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돈 맛'을 아는 해외 자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빠른 자금순환과 높은 단기이익을 추구하는 해외 자본의 속성에 걸맞게 97년 태국 총외채 890억달러 중 대부분이 증권, 소비자금융, 부동산에 밀집돼 있었다. 태국이 외국은행에 진 빚은 92년 50억달러에서 96년 460억 달러로 9배이상 급증했다.
해외 자본이 투기적 본성을 드러낸 것은 96년 이후부터. 그해 태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GDP의 8.2%에 달했고 97년초 부동산 가격마저 폭락했다. 당시 태국에 유입된 외국 자본 중 200억달러 가량이 주거용 및 상업용 건물에 투자돼 있었으나 부동산시장 냉각으로 전혀 매매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었다. 태국 경제는 공황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97년 4월 투기자본은 태국 외환시장 공략에 나섰다. 이들은 선물시장에서 150억달러어치 정도로 추정되는 바트화를 대량 매입한 뒤 6월 들어 곧바로 팔아치우기에 나섰다. 이들이 바트화 거래에 사용한 방법은 당장 현금이 필요없는 공매도 방식.
이같은 투기자본의 '바트화 팔자, 달러 사자' 공세에 태국 중앙은행은 보유 중이던 달러를 시중에 풀어 바트화를 달러당 25바트로 고정시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태국이 입은 손해는 현물 외환시장에서 최소 90억달러, 선물시장에서 240억달러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7월2일 태국 중앙은행은 결국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도입했으며, 곧이어 바트화의 20%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투기꾼들의 공격은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이어졌다. 필리핀 페소화는 7월11일, 말레이지아 링기트화와 인도네시아 루비아화는 8월 들어 변동환율제로 돌아섰다. 아울러 그해 12월까지 각국의 통화가치는 30~80%까지 평가절하됐다.문민정부 이후 단계적으로 외환시장을 개방한 한국의 경우 94년 12월 560억달러이던 단기성 외채는 97년 6월 1030억달러로 2배 가량 늘었다. 무역수지 적자가 누적되던 상황을 고려할 때 결코 수월치 않은 규모였다. 게다가 동남아 외환위기의 여파로 엄청난 규모의 부실채권이 쏟아졌고 이에 놀란 일본 금융기관들은 한국내 투자금 회수를 서둘렀다.
아울러 한보, 기아 등 대기업 부도 사태, 홍콩증시 폭락 등의 악재가 이어졌다. 결국 외국 금융기관들은 97년 11월 한국에 대한 모든 단기외채의 만기 연장을 거부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이어지고 말았다. 국제적 채무해결사인 IMF가 등장한 것이 바로 이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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