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맞닿아 있는 마을, 봉화군 소천면. 읍에서도 차로 내리 40여분을 달려야 하는 이곳에 가려면 험하기로 소문난 늪재와 노루재를 넘어서야 한다. 태맥 산맥의 한 귀퉁이를 차지 하고 있는 해발 1천200여m의 청옥산. 그아래 펼쳐진 소천은 평균 해발 600m. 5월 말. 이미 다가선 더위가 여름의 기운을 느끼게 했지만 소천은 달랐다.
태양은 따가워도 바람은 찬기운이 넘친다. 소나기라도 내리면 싸늘함이 파고들 정도.
한때 산판으로 이름을 날리던 소천은 이제 '오지' 덕에 여름철 관광지가 됐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 삶은 예전 그대로다. 그 흔한 포장길이나 마을버스조차 없는 산골 마을들. 한달이 지나봐야 사람 구경하기 힘든 산골 사람들에겐 유일한 '벗'이 있다. 바깥 세상을 들고 오는 집배원.
옛날 군에 간 아들과 도회지 공장에 돈 벌러 나간 딸자식의 안부를 전해 주던 한통의 편지. 대청 마루에 앉아 그 편지를 까막눈 할머니에게 읽어주고 대필까지 해주던 '인생'의 전령사. 지금은 어떨까.
소천면 소재지인 고선2리 소천우체국에서 만난 남순철(30)씨. 남씨는 1938년도에 세워진 소천우체국에 근무하는 경력 4년의 집배원. 산골의 순박함을 간직한 얼굴처럼 그는 아직 '동심'을 안고 있었다.
"지난주에 뱀을 잡았는데 조금만 일찍 왔다면 좋았을 텐데". 생면부지의 취재 기자에게 그는 불쑥 '뱀' 이야기로 친근감을 나타냈다.
"산짐승이 친구죠. 집배원 생활하다 보니 진짜 뱀꾼이 돼 버렸습니다".
취재진은 남씨를 따라 나섰다.
오전 10시. 남씨가 동료 집배원 3명과 함께 88㏄ 오토바이의 시동을 거는 시간이다. 그전에는 아침에 도착한 우편물을 분류하고 장을 봐야한다.
출근후 장거리에 나가는 것은 시골 집배원들의 빠질 수 없는 일과. 전화나 배달길에 부탁받은 농약이며 농기계 부품, 반찬거리 등을 준비해야 한다. 남씨가 이날 배달해야 하는 우편물은 200여통. 이중 절반 이상이 신문이다.
"대구 집배원들의 하루 평균 배달량의 20%선입니다. 하지만 워낙 오지여서 눈이라도 내리면 이것도 소화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소천 우체국장의 설명이다.
남씨의 하루 배달 거리는 평균 60~70㎞. 지급 받은지 1년 반이 조금 지난 오토바이는 이미 2만6천㎞를 넘어 섰다. 남씨는 "배달 지역의 80%가 비포장 길인데다 암자만 18개가 있다"며 "타이어 수명이 길어야 두달"이라고 했다.
우체국을 나선 남씨는 1시간여 동안 계곡을 따라 난 국도변 농가며 휴게소 등 10여곳을 거쳐 요란한 오토바이 엔진을 껐다. 산속 암자에 가야 하는 탓이다.
비로굴은 국도에서도 5리길. 20여분을 부지런히 걸으면 농가를 개조한 암자가 나타난다.
"겨울이면 이길에서 노루며 토끼를 지천으로 만난다"는 남씨는 "지난주 뱀을 잡은 곳이 바로 여기"라며 웃음을 지었다. 독살이 수행을 위해 3년전 비로굴에 들어왔다는 문선 스님은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이 남씨"라며 친근한 웃음을 지었다.
편지 한통을 전한뒤 암자를 내려온 남씨는 다시 강씨골로 향했다.
강씨골은 원래 30채가 넘는 화전민 가옥들이 흩어져 있던 곳. 50리가 넘는 산길을 따라 지금은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다행히 이곳은 오토바이가 들어가지만 끝집까지 갔다오면 빨라도 1시간 입니다". 남씨는 점심의 대부분을 강씨골에서 해결한다.
"밥 먹고 가라며 잡는 집도 많고 때로는 밥을 달라며 먼저 청하기도 한다"는 남씨는 "제사며 잔칫날을 훤히 꿰고 있다"고 했다.
강씨골과 붙어 있는 홈점골의 마지막 집에 들어서자 집주인이 반기고 나선다."자식놈 다음으로 반가운 사람이지. 내 유일한 친구야". 조상대대로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이대연(60)씨는 지금은 부인과 두명이 산골을 지키고 있다.
"4명이나 되는 자식들이야 대구며 서울에 살기 때문에 일년에 한두번 얼굴 보기도 힘들다"는 이씨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만 들어도 반가울 정도"라고 했다.
이렇게 골짜기들을 돌아 배달이 끝나는 시간은 오후 4시. 이때부터는 또다른 일이 시작된다. 각종 공과금 고지서를 대납하고 낮에 받아온 소포나 등기를 보내야 한다.
"고지서가 나오면 세번 일을 해야 합니다. 일단 고지서를 배달한 뒤 돈과 같이 받아와 우체국에 내고 다시 영수증을 갖다줘야 합니다".
보험료나 적금 등을 대납하는 것도 집배원들의 주요 업무."체신청에서 은행 업무를 시작한 뒤론 개인 실적을 내기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남씨는 "그 덕에 나도 재테크 공부를 많이 하게 됐다"며 웃었다.
소천을 떠난 취재진은 상주시 화북면으로 향했다.
지역 대부분이 소백산 국립공원에 편입된 지역. 상주시에서 1시간을 달려 갈령 벌띄재를 넘어야 면 소재지가 있는 용유리에 도착할 수 있다.
면전체 가구수가 700여호를 조금 넘는 동네인 만큼 소재지도 조용하기 그지없다."마을 대소사는 다 참가해야 합니다. 부조금만 해도 만만치 않죠". 부임한 지 6개월이 됐다는 우체국장 박병조(49)씨는 화북면의 유지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처지지만 아이 돌잔치까지 초대를 받습니다. 시골 우체국장 역할은 말그대로 마당쇠죠".
농번기인 요즘은 우체국이 일년중 가장 바쁜 철. 일찍 찾아오는 주민을 위해 오전 8시에 우체국 문을 열어야 하고 주민들의 갖은 심부름을 다해야 한다.
"면단위 우체국의 20, 30%를 줄여야 하는데 고민입니다. 업무량을 수치만으로 계산하면 답이 나오지만 집배원들이 시골의 유일한 서비스맨인 탓에 함부로 손 댈 수가 없어요". 집배원 구조조정을 위해 화북 우체국을 찾았다는 경북체신청 박도현 계장의 설명에 쉽게 이해가 갔다.
조선말 우정국이란 이름으로 등장한 우체국. 한세기를 지나 2000년을 앞둔 시기지만 '집배원'이 촌로에게 전해 주는 '따듯한 소식'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글·李宰協기자
사진·李埰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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