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노래하던 시인 김지하(金芝河·58)씨. 시인의 이름 앞에는 항상 다양한 수식어가 붙었다. 혁명가·저항시인· 생명운동사상가‥.
그의 행동 반경과 사상의 궤적이 그 만큼 넓고 깊다는 반증이다.
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을 시작으로 유신시대를 지내면서 그는 독재와 온몸으로 맞서 싸우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한 시인은 80년대에는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나아간다. 현실세계의 해방논리로서 '생명운동'을 주창, 그젖줄을 수운 최제우와 강증산의 주체적 민중사상에서 찾는다.
대학생들의 투신이 잇따르던 91년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일간지 기고문에서 '죽음의 굿판을 중지하라'고 운동권을 향해 외쳐 찬사와 비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뒤 칩거와 투병을 거듭하다 근래에 침묵을 깨고 단군, 수운, 증산 사상을 뿌리로 하는 '천지공심(天地公心)'론을 주창하면서 새로운 문화운동을 모색하고 있다. 대구를 찾은 시인 김지하씨를 만나 새로운 문화운동의 내용과 영남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아 본다.
대담=申道煥 기획특집부장
-지난 25일 계명대에서 '천지공심'을 주제로 강의했는데 무슨 뜻인가.
▲시민사회를 이루는 원리는 사회적 공공성이다. 사회적 공공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시민운동이요 시민정치다. 이에 반해 천지공심은 우주·사회적 공공성을 말한다. 고조선 시대 '천부경'에 '인중천지인(人中天地人)'이란 말이 있다.
사람안에 천지가 하나다 즉 천지공심이란 말이다. 그뒤 수운 최제우선생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때 오심즉여심, 하느님 마음이 사람 마음 즉 '신인일체'라는 말을 듣는다.
이를 공공성 차원에서 해석하면 '천지공심'이 된다. 15세기부터 조선사회는 봉건제가 아니라 중앙집중적인 관료국가였다. 조선후기 순조 철종 때 사회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가렴주구와 착취 가뭄으로 민중의 사회적 삶이 해체되고 문벌 또는 가족 중심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새 시대의 새로운 차원의 공공질서가 필요한 때에 수운이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자연과 사회 양쪽에서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전세계적 불황과 환경이변을 꿰뚫는 통일된 담론이 아직 없다. 새로운 담론의 원형이 '천지공심'이다.
-수운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도출한 셈인데 누구나 '천지공심'이란 말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우주적 공공성의 동양적 표현이다. 지금 환경운동과 시민의 권리찾기 운동은 뿔뿔이 흩어져 있다. 시민운동은 사회적 공공성이라는 한계 안에 갇혀 있고 환경운동은 자연과 문화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대의로 뭉쳐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사회를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는 철학적 근거, 큰 담론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천지공심'이다.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철학적 원리를 수운선생은 19세기 후반에 이미 이야기했다.
현대사회에 필요한 우주적 공공성이란 사상이 이미 19세기 한반도에서 나온 것이다.
-서구적 담론으로 현대의 대혼란을 담아낼 수 없다면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왜 영남에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야 하는가.
▲1860년 4월 5일 오전 11시 경주 용담 골짜기에서 수운은 대격동의 시대, 카오스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질서, 새시대 새삶의 원형을 발견했다. 바로 신인간, '천지공심'을 가진 홍익인간이다.
서양에서는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자 들뢰즈 이후 20여년 전부터 특징있는 담론이 나오지 않았다. 탈근대 카오스시대, 새로운 세기의 담론이 필요한 때다. 중국은 돈벌이에 여념이 없고 일본은 정신적으로 기울어 있다.
사회적 경제적 고통, 분단의 고통이 만연돼 있는 고통의 땅에서 사상적 전통을 살리기만 하면 새 세기에 대한 메시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신라시대 이후 영남은 한반도의 사상적 두뇌였다. 주요 정책 결정자들이 영남에서 나왔다. 사림파의 본거지도 영남이었고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과 같은 대학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한반도 불교를 통일한 원효와 같은 대사상가도 영남에서 났다.
생태계문제를 해결할 환경운동과 시민 권익운동을 아우르는 큰 담론을 제기하는 것이 사상의 본고장인 영남의 역할이 아닐까. 새로운 담론은 수운의 땅, 원효의 땅, 최치원의 땅, 바로 영남에서 나와야 한다.
-새로운 담론의 생산지가 영남이라면 대구의 역할은….
▲앞으로 문화가 정치 경제보다 핵심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미국은 이미 정보 인프라로 세계를 장악했다. 남은 것은 콘텐츠(내용)다. 창조적 아이디어,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창의력이 필요하다.
대중예술 속에서도 꽃을 피워야 하기 때문에 미학적 생산성이 있어야 한다. 미학적 생산성이 보장되려면 과학과 미학이 결혼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체, 개인이 아닌 집단적 주체다. 대구가 수운의 목을 잘랐다는 점을 기억하자.
영남은 이 피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 이 지역에는 떨거지 성리학자들이 말도 안되는 큰 소리를 내고 있다. 이미 기운이 빠졌다는 얘기다. 영남의 기운은 영남 민중에게 와 있다.
이제 우리 사상의 원류를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군과 상고사에의 현대적 부활이 필요하다. 상고사의 복권을 영남이 제기하면 호남이 호응하고 충남이 가세해야 한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6개 도의 젊은 민중 지식인들이 기행도 조직하고 탐사도하고 대구 전주 남원 광주를 돌아가며 세미나를 열자. 영남의 수운으로부터 일어나는 동학의 사상사, 해월로부터 시작되는 북접계열의 조직사, 남원에서 시작되는 남접조직사, 전라도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동학혁명운동사…. 이런식으로 일관된 흐름을 잡아야 한다. 이것은 상고사의 회복이요 단군의 복권이다.
이 흐름은 민족 주체적이고 민중 주체적이면서 탈근대적 전망까지 가진 사상이다. 생명론 생태학 후천개벽론 우주시대의 새로운 원형을 가진 사상이기에 오늘날의 뼈대가 된다. 이 역사적 원리를 밝혀야 우리가 하나임을 알게 된다. 지역감정도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새로운 사상은 항상 서양에서 들어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리산 운동을 통해 지방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하버드로 새로운 사상의 메시지를 보내보자.
상고사 교육을 즉각 중지하고 전민족적인 상고사 연구 및 교육운동을 제안하자. 새로운 상고사 교육안을 만들자. 단군은 신화가 아니다. 곰의 자손도 아니다. 기원전 1천년으로 고조선을 한정하는데 상한연대를 5천년으로 확대하기 위한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해야한다.
상고사를 한반도에 한정시켰는데 이것을 뒤집어야 한다.-최근 대중들에게는 다소 난해하고 낮선 '율려(律呂)운동'을 들고 나왔는데.
▲율려란 중국 신화시대의 임금인 황제 때 영륜이 대나무로 만든 음률 표준기이다. 이 율려는 시대의 중심음이요, 기준 체계이다. 새시대를 열기위해서는 새로운 율려가 필요하다.
지난 시대의 율려는 '황종'이 중심음이었으나 새로운 시대에는 '협종'이 중심음이 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협종이 황종의 자리를 차지 했는데 이는 양 중심의 문화에서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로 전환하는 것이다.
-김지하씨는 저항시인으로 비쳐져 왔다. 생명운동에 이어 '율려운동'을 들고 나오니 사상가로의 변신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문학 창작 활동은 중단한 것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운동이다. 이 운동에는 문화가 중요하다. 예술문화는 내 본업이다. 문화에서부터 정치·경제·사회적 새 비전을 보여주는게 내 일이다.
내 전공은 미학이다. 문화의 핵심은 미학적 창조력이다. 감옥 생활하느라 미학 공부를 제대로 못했는데 미학자로 돌아가 미학 논문을 많이 쓸 것이다. 명지대에서 '흰 그늘의 미학'이라는 강의를 하고 있는데 내년초쯤 정리돼 책으로 나올 것이다.
시는 5년 동안 못쓰다가 한달 전 7편을 썼다. '흰 그늘의 길'이라는 연작시다. 스타일이 옛날하고 다르고 너무 우울해 발표를 꺼리고 있다. 화창한 글도 나오면 묶어서 내년 상반기쯤 시집을 낼 것이다.
(담배와 술을 끊고 난 다음) 몸이 좋아져 문학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세개의 사랑이야기'라는 드라마가 10월에 공연되고 올 여름 '신시'대본을 쓸 것이다.
-끝으로 대구 경북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정치 경제적 패러다임은 낡았다. 혼돈(카오스)이라는 문화의 바다에서 새로운 코스모스(질서)에 대해 꿈을 꾸자. 영남은 더 이상 박정희 시대의 정치 경제적 프리미엄을 꿈꾸지 말자.
지금은 '문화의 시대'요, '사상의 시대'다. 이 대전환기에 새로운 중심운동과 원형을 제시할 내용이 영남에서 나왔다는 것을 명심하자.
〈정리·李鍾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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