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회색의 빌딩 틈바구니에서 복닥대며 살아가는 도시 직장인들의 경우 가끔씩 출·퇴근길 코스를 바꿔 변화를 줘보면 하루가 한결 즐거워진다는 내용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일상에서 그 자체가 아침저녁의 미니여행이 돼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고 했다.
한일로에서 경북대 치대 쪽으로 가는 길, 옛 대구여고터에 자리잡은 국채보상기념공원. 언제부터인가 그 공원 옆을 지나노라면 기분이 상큼 좋아진다. 한가로이 산책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차로 지나칠 뿐인데도 짧은 순간에 만나게 되는 자그마한 녹색 숲이 입안에 퍼지는 그린 민트향처럼 상쾌하다. 날씬하게 뻗은 나무들 밑을 걷는 시민들의 발걸음도 경쾌하게 보인다.
하나 둘 헐리는 담장들
길 건너편, 울타리가 사라진 경북대병원의 잔디밭에서 한 가족이 오손도손 점심도시락을 먹는다. 도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여유롭고 평화로운 장면이다.
길을 틀어 경상감영공원 쪽으로 가본다. 돈을 받지 않고는 결코 문을 열지 않았던 인색했던 이 곳이 담장을 헐고 낮은 자의 모습이 돼 누구든 와서 쉬라고 손짓한다. 5월의 녹음에 둘러싸여 벤치에서 담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삭막한 도시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동 동산병원 쪽으로 가볼까. 서문시장이 있어 왼종일 차와 사람들로 복작대는 거리.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이곳 풍경이 서서히 달라져 가고 있다. 올해 100살의 동산병원건물을 완고하게 감싸고 있던 담장이 사라졌다. 담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엔 동양화에나 나옴직한 멋스런 자태의 홍송과 각종 수목들이 새롭게 자리잡고 있다. 멀지 않아 한편의 운치있는 풍경이 펼쳐질 게다.
신천동의 한 유치원도 20여년간 둘러쳤던 쇠담장을 헐었다. 벽돌과 쇠를 뽑아낸 자리에 둥글둥글한 화강암들과 영산홍으로 아기자기하게 작은 거리정원을 꾸몄다. 아이들이 오르락 내리락 뛰어놀기도 하고, 행인들이 걸터앉아 다리쉼을 하기도 한다. 자원하여 이 작은 정원을 돌봐주는 이웃도 있다 한다.
내것과 네것을 갈랐던 높은 담장들이 하나둘씩 무너져 간다. 참으로 신선한 광경이다. 보는 것 만으로도 엔돌핀이 솟구쳐 나오는 것 같다.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열고 대문을 기웃거리던 동네 아이들을 뜰로 불러들였을 때 죽었던 나무들이 다투어 꽃을 피워내고 바람은 신이 나서 향기를 퍼뜨리는, 동화속 키다리 아저씨의 뜰처럼 경이롭기까지 하다.
마음의 벽도 허물어야
이젠 담만 무너뜨릴 게 아니라 너와 나를 가로막는 마음의 벽도 허물어야 할 것이다. 불신과 갈등, 지나친 경쟁의식들로 바벨탑처럼 한없이 높아진 우리 마음의 담. 그것들이 허물어지는 곳에 인간사랑이 움터 나오고, 시·음악·미술·무용·연극같은, 우리 삶을 채색해 주는 문화예술의 포자들이 날아와 싹 틔울 것이다.
미국의 세계적인 팝가수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이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가진 콘서트 실황 장면을 레이저 디스크로 감상한 적이 있다. 수많은 팬들이 잔디에 앉거나 나무에 기대선 자유로운 모습으로 주홍빛 석양에 얼굴을 물들이며, 음유시인들의 노래에 조용히 취해가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역시 레이저 디스크로 봤지만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숲속에서 갖는 작은 콘서트는 무척 이색적이고도 낭만 가득한 것이었다.
구태어 센트럴 파크나 하이드 파크, 블로뉴숲이 아니면 어떠랴. 작은 땅덩이의 우리에겐 무너진 담과 그곳 작은 숲들의 의미가 결코 작지 않는 것을.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라면 이들 작은 숲들은 대구의 허파이다. 삶의 산소를 뿜어내는 싱싱한 허파들이 자꾸 늘어났으면 싶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채로운 문화예술의 향기를 맡고 싶다.
거리문화공연 삶의 활력소
거리문화운동을 펼치는 축제문화연구소가 얼마전 국채보상기념공원에서 가진 도란도우(道蘭都友:거리에 물결을 만드는 도시의 친구들) 거리 공연은 작지만 아름다운 사건이었다. 조성진씨의 마임 공연과 현대무용단 탄쯔의 춤은 생활속의 예술이 보여주는 겸손함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봄비처럼 적셔주었다.
컴퓨터황제 빌게이츠는 21세기를 속도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속도가 우리의 우상이 돼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분주할수록 잠깐 쉬었다 가는 삶의 뜸들이기가 필요하다.
완강한 담들의 사라짐, 그것은 폐쇄된 도시인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열쇠이다. 삭막한 도시에 문화예술의 생기를 불어넣는 '그린 인프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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