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mm 무성영화에 담은 '조선사랑'

입력 1999-05-21 14:10:00

"어쩌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 나의 심정은 한 민족을 무덤에 묻은 장례행렬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착잡하기만 하다"

독일신부 노베르트 베버(1870~1965). 그의 '조선 사랑'은 1914년 발간된 조선여행기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의 마지막 장에 잘 드러나 있다. 일제의 강점에 허덕이는 조선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이 배여있다.

베버가 초대원장을 지낸 독일 뮌헨의 성오틸리엔 수도원. 지난해 여름 창고 수리를 위해 벽을 헐던 중 몇통의 필름이 발견됐다. 1920년대 조선의 모습을 15km 길이의 필름에 담은 기록물이었다. 나치의 손아귀에서 보호하기 위해 벽속에 묻어둔 베버신부의 또다른 '조선 사랑'의 징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5월 창간한 월간지 '들숨 날숨'은 한국 최초의 문화 다큐멘터리인 이 기록필름을 독점 입수해 공개했다.

이 기록필름은 '한국의 결혼식'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등 두편. 1911년 조선을 떠난후 1914년 여행기를 발간하고도 조선을 잊지 못해 1925년 무비 카메라를 갖고 재입국해 촬영한 35mm 무성 다큐멘터리다.

'한국의 결혼식'은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사례금을 주고 당시 결혼식 모습을 재현해 필름에 담은 것. 족두리에 사모관대를 쓴 20년대 시골 결혼풍습을 고스란히 담아내 당시 시대상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여겨진다. 촬영장소는 함경남도 안변군의 내평성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당시 서울 시가지를 비롯, 조선의 장례의식과 농사 풍경, 금강산 풍경과 선교사들의 활동 등을 담고 있다. 동네 어귀에 돌아가는 물방아, 수 놓는 소녀, 물레질과 다듬이질하는 아낙의 모습, 흥겹게 사물놀이하는 놀이패, 절의 모습과, 장승이 버티고 있는 동네 어귀의 풍경 등 1920년대 조선의 사회상을 애정어린 손길로 기록했다.

베버는 일제에 의해 사라지고 있는 조선의 문화를 안타깝게 여긴 '선각자'. 1908년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여행기를 발간해 유럽에 조선을 알렸으며, 조선의 문화 보존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들숨 날숨'은 창간호를 시작으로 몇차례에 걸쳐 특집으로 베버의 필름을 다룰 예정이다.

〈金重基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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