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전상문(대구구치소소장)

입력 1999-05-15 14:04:00

비가 그치길 바라며 하늘을 흘겨보다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순경만 봐도 걸음을 멈출 양심적인 어르신인데 직장에 다니던 아들이 특수강도로 휩쓸려 구속됐노라며 이제 집안이 망하게 됐다고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큰 일 날뻔 했지만, 참 잘 됐습니다"

"자네 잘 됐다 말하는가? 이런데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가 본데 그 애가 부모 잘못 만나서 그렇지 좀 똑똑했는가!"

"예예, 저도 알지만 이렇게 붙잡혔기 망정이지, 바늘도둑이 얼결에 사람까지 다쳐서 평생을 망친게 어디 한둘이랍니까? 이 참에 철들면 그런 다행이 없지요. 아직 어리니 특수강도 처음이면 그리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그래서 운이 좋았다는 게지요"

"운이라 했는가? 내 그러잖아도 한군데 물어봤더니 그 애가 국록을 먹을 운인데 공부를 덜해서 국록 먹을 액땜으로 이리 됐다며 이걸 몸에 지니면 액막이가 된다하데. 그 애 옷속에 좀 넣어주게나"

그는 꼭꼭 접힌 부적 한 장을 내밀었다. "얼마나 주셨습니까?" "그건 알거 없고, 자아!" "죄송하지만 이건 어르신께서 보관하시는게 낫겠습니다. 그 애가 이걸 가진 것처럼 되도록 해보겠습니다" "이것도 안된단 말인가"

힘없이 체념하시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이런 영물을 지니면 부정타지 않도록 행동을 조신하게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게 맘대로 안되므로 자칫 도로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 마음으로만 가진 걸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둘러댔다.

운수만 의지하는 것은 그릇된 사고방식이므로 그 결과 또한 잘못될 수 밖에 없으니 현실은 반드시 합리적인 판단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아이에게 떠먹이듯이 타일렀다.

법없이도 살아갈 그 아버지에게는 약이 되는 부적이지만 믿을 데가 있다고 천방지축으로 날뛸 그 아들에겐 혹 독이 될 수도 있겠거니 하는 마음에서였다.

영어의 몸이 된 아들을 위해 부적을 액막이로 들고 와 안타까운 부정을 보여준 그 노부를 보면서 문득 어느 비오는 날 우장을 꾸리고, 물꼬를 트기 위해 논배미로 나가시던 내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괜스레 가슴이 저려왔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