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 세상읽기-묘지의 쇠말뚝과 식칼

입력 1999-05-04 00:00:00

얼마전 이회창 총재 선영에 쇠말뚝을 박은 사실이 발견됐을 때에는 그 원인을 정치적 동기에 두려는 분위기였다. 풍수설에 따라 묘에 쇠말뚝을 박아두면 혈맥을 끊어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이순신묘·이황묘와 세종대왕릉 등 수십군데에 쇠말뚝과 식칼이 꽂혀 있는 사실이 발견됐다. 유명한 역사인물의 묘지와 임금의 능에 박혀 있다는 점에서 더욱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처음에는 그 동기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한데 이런 짓이 한낱 무당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어이가 없었다. 재앙이나 원귀(寃鬼)를 물리친다는 따위 잘못된 믿음탓이었다.

우리 사회에는 하나의 이상스럽고 근거도 없는 풍설이 꾸준히 나돌아 왔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명산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백운대나 문장대 등의 마루에 어른 팔뚝만한 쇠말뚝이 박혀 있어서 시민이나 등산가들이 이를 뽑아냈다.

일본사람들이 풍수설에 따라 조선에 인물이 나지 못하게 하려는 짓이라는 말들이 돌았고, 누구도 여기에 회의를 갖지 않았다. 신문과 방송들도 덩달아 동조하고 나섰다. 이것이 사실일까? 한번 살펴보자.

글쓴이는 이 사실의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 자료를 찾아 나섰다. 일제 식민지 시기 이와 관련된 조선총독부 지시가 있었는지 일본사람들이 이와 관련된 글을 쓴 것이 있는지 찾아 보았고 당시 신문·잡지의 가십까지 들춰 보았다. 또 이시기를 전공하는 학자들에게 문의도 해보았다.

전혀 한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미신타파 운동을 벌였다. 풍수설도 그런 범주에 속했다. 또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풍수설을 거의 믿지 않았다.

일본은 개항이후 우리나라 연해의 해도와 육지의 지도작성 권한을 보장받았다. 그래서 측량사들이 우리땅의 연해와 육지를 들쑤시고 다녔다. 그들은 우리나라 지리사정을 알아내 식민지로 만드는 자료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 해도는 지금도 그대로 쓰여지고 있다.

이럴 때 산마루나 중요 지점에 말뚝을 박았던 것이다. 지도작성에는 삼각지점에 표시를 하는 것은 기본이라 한다. 특히 풍수가들이 지금도 중요한 산 위에 시설물을 지기(地氣)를 꺾는다고 해서 반대한다. 이런 말뚝을 풍수가들이 "인재를 나지 못하게 하려는 짓"이라고 믿었거나 아니면 헛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

풍수설은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널리 퍼졌다. 초기에는 절터·집터 등 양택(陽宅)에 적용했다가 차츰 묘지를 잡는 음택(陰宅)으로 옮겨 갔다. 묘지는 바람을 막고 물을 만나는 곳에 잡아야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좋은 묘터를 잡으려 혈안이 되었고, 심지어 좋은 장지라 여기면 남의 땅을 빼앗거나 몰래 시체를 묻는 지경에 이르렀다. 근래에도 이런 믿음은 가시지 않아 전국의 산야를 오염시키고 있다.

음택의 발복설(發福說)은 사라질 줄을 모르고 있다.우리는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서나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키 위해서도 장지문화의 개선이 시급하다.

그래서 묘지제한의 법 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민간단체에서 화장을 권장하기도 한다. 풍수설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말할 뿐 발복과는 무관하다는 의식이 이루어져야 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쇠말뚝과 식칼을 박았다고 지기를 꺾는 것이 아니라 음택설에 따라 묘터를 잡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한다. 호화분묘로 조상에 보은하려 하지 말고 살아있을 적에 효도를 다하며, 묘자리를 잘 잡았다고 후손들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개인발전의 밑거름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풍수쟁이의 말을 믿지 말고 좀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삶을 꾸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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