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여명의 군중들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귀향을 보기 위해 모스크바역에 나와 기다렸다.
1974년 소련에서 추방된 후 망명생활 20년만의 귀국길.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 여정에 오른 그는 5천700마일을 달려 2개월만에 자신이 저주했던 공산체제의 심장부 모스크바에 당도했다.
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현대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학가 솔제니친의 귀향 일성은 이러했다. "나는 지금 러시아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신음소리가 전국에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아무도 고통없이 공산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있으며 정부는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1918~). 카프카즈지방 키슬로보드스크에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남부 돈 강변의 로스토프시에서 자라났다. 코사크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를 어릴때 여의었다.
아버지는 톨스토이에 심취했던 인텔리였다. 솔제니친은 일찍부터 자연과학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20년대 사회적 혼란과 궁핍, 급변하는 교육내용 등은 어린 솔제니친에게도 못마땅한 것이었다.
더욱이 스탈린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강요된 사상은 그에게는 염증을 느끼게 할만한 것이었다. 무엇인가 쓰고 싶다는 욕구와 자각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대학시절 그의 전공은 수학이었다.
로스토프대학에서 물리를 공부하면서 솔제니친은 모스크바에 있는 역사, 철학, 문학전문학교의 통신과정을 이수했다.
41년 대학 졸업직후 독소(獨蘇)전쟁의 발발로 그는 자원했다. 청년장교 양성을 위한 강습을 받고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레닌그라드, 백러시아 등을 옮겨 다니다 대위로 진급한 그는 '조국전쟁' '붉은 별'이라는 훈장도 받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인 45년 1월 베를린으로 진격중이던 솔제니친은 돌연 훈장과 견장을 박탈당하고 체포됐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스탈린을 비판한 것이 화근이었다.
모스크바 형무소에 수감돼 8년형을 선고받았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석공 등으로 복역한 그는 53년 형기 만료로 출옥했으나 카자흐공화국 벽촌으로 추방당한다.
이곳에서 수학교사로 일하며 장편소설 '첫번째 원' '연옥속에서'를 쓰기 시작했다. 56년 유형지에서 귀환이 허가됐다. 11년만의 일이다.
그를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쓰여진 것은 추방생활의 끝무렵이었다.스탈린 격하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초 솔제니친은 정부의 문화적 생활에 대한 억제책이 완화된데 고무돼 소비에트 문학계간지 '노브이 미르'(신세계)에 자전적 단편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62년)를 발표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한 이 소설은 스탈린시대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된 인물의 전형적인 하루를 묘사한 작품. 반응은 빨랐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게 되면서 솔제니친은 일약 유명인사로 급부상했다. '노브이 미르' 편집장 트바로도프스키는 이 작품을 '예술적 도큐멘트'라는 의미의 서문을 달아 작품을 게재했다.
전혀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도 매우 끈적끈적한 문체는 작가의 문학적 결의를 느끼게 한다.
가장 비인간적인 환경속에서 인간적인 것의 핵심을 추출해 보인 그의 문학적 태도는 그후 계속해 '크레체토프카 역에서 생긴 일' '마트료나의 집' '공공을 위해서'로 일관되게 흐른다. 63년 솔제니친은 그의 가장 중요한 장편소설로 평가되는 '암병동'을 쓰기 시작했다. 66년에 제1부를 완성하고 이듬해 2부를 완성해 탈고했다.
하지만 64년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실각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문화예술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탄압은 더욱 거세지고 솔제니친은 점차 커져가는 당국의 비판과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소비에트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은 '암병동'을 '사상적으로 보아서 본질적으로 개작할 필요가 있는 작품'으로 단정짓기도 했다. 63년 단편집을 펴낸 직후 그는 더이상 자기 작품의 공식적인 출간을 거부했다.
대신 그의 소설은 '사므이즈다트'(지하출판물)의 형식으로 배포를 시작했다. 당국의 허가없이 불법 유인물로 배포된 그의 작품은 은밀히 인민들의 손에 손을 거쳐 읽혀졌고 멀리 외국에서 출간됐다.
소련내 문학애호가들은 '암병동'의 원고를 복사해 돌려가며 읽었다. 지난날 '닥터 지바고'를 둘러싼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수난을 연상케하는 사태였다. 69년 솔제니친은 반소(反蘇)작가라는 낙인이 찍혀 작가동맹에서 추방됐다.
73년말 파리 YMCA출판사에서 출간된 '수용소 군도'를 이유로 국외추방이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74년 2월 그는 망명의 길에 올랐다. 서독,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를 전전하다 미국 버몬트주의 작은 마을 캐번디시에 정착했다.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조국과 떨어져 산다는 일이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다"고 망명생활중에 토로했다.
말없는 웅변과 같은 문학작품들이 겪은 수난사였다. 권력의 억압과 횡포를 극복해 마침내 살아남을 작품들. '닥터 지바고'가 그러했고 '암병동'이 그러했다.
문학사적 입장에서 보면 솔제니친은 지난날 비평가들이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른 19세기 러시아문학 전통을 현대로 계승, 발전시킨 작가다. 그는 진정한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산 증인이다.
80년대초 솔제니친은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에 기고한 '폴란드 사태가 주는 교훈'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20세기 인류를 위협하는 위험은 어떠한 나라, 어떠한 국민, 어떠한 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만인의 악에서 온다는 점이다. 무서운 사실은 '크렘린의 강압'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허약해진 우리가 공산주의가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파묻힌다는 점이다"
〈徐琮澈기자〉
---닥터 지바고와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로 5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는 파란많은 삶을 살다 간 작가였다.
'역사에 저항한 시인'으로 조명되고 있는 그는 고뇌와 함께 일면 모순의 작가였다. 금세기초 러시아 문학계의 주류였던 상징주의나 미래파로부터 독자적 창조를 고집했던 그는 처음에는 러시아 혁명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으나 이내 혁명에 대한 환상을 상실하고 만다.
하지만 혹독한 스탈린시대를 거치면서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저항해 고초를 겪었다. 심지어 '욕심에 눈이 먼 문필가' '인민의 적이며 배신자'등으로 매도됐다.
이태리에서 '닥터 지바고'가 출간되자 소련당국과 작가동맹등 동료문인들은 그를 거세게 비난했고 60년 사후 소련당국은 그의 흔적은 깡그리 없애려고까지 했다.
러시아의 개방물결로 해금된 그는 지난 90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문학의 해빙과 함께 '진실을 추구한 고독한 작가'로 러시아인으로부터 추앙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