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대시의 실질적인 출발기점은 '자유시'가 본격적으로 발표되기 시작한 '1915년 전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새로 제기됐다.
문학평론가 김영철교수(건국대)는 월간 '문학사상' 5월호에 기고한 '해방전 한국시의 5대 쟁점-근대시의 기점을 둘러싼 논쟁'을 주제로한 논단을 통해 이같이 주장하고 1910년 '소년'지 2월호에 발표된 육당 최남선의 '태백산부'와 '태백산의 사시(四時)'를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했다.
정형시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율을 바탕으로 했고 내재율이 적절하게 실현되고 있는 점등이 이 작품을 자유시의 효시로 꼽은 배경. 따라서 '소년'과 더불어 1910년대 자유시 창작의 주요 산실인 시문예지 '학지광'에 발표된 김억의 '이별'(1914년)을 비롯 현상윤, 최승규, 김억, 김여제 등의 자유시가 본격 발표된 시기(1915년)를 한국 근대시의 기점을 잡아야 하며 1914년은 한국 자유시의 개화에 기념비적인 해라는게 김교수의 견해다.
그 근거로 김교수는 근대시는 자아 정체성이라는 근대의식을 담아내는 시형식이라고 규정하고 사적 리듬, 즉 개성적 리듬으로 자아의 내면세계를 자유롭게 드러낸 시가 바로 근대시이므로 '근대시는 바로 자유시'라고 정의했다. 이 때문에 근대시의 기점은 논리상 자유시의 기점론과 일치, "정형시에서 자유시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시형태인 신체시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자유시의 흐름을 한국 근대시의 기점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김교수는 주장했다.
이제까지 학계서는 한국 근대시의 기점을 둘러싸고 학자마다 견해가 엇갈렸다. 문학평론가 백철, 조연현이 주요한의 '불놀이'를 자유시의 효시로 규정한후 오랫동안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불놀이' 이전에 많은 자유시가 발표된 것으로 근간에 확인돼 이 정설은 문헌적 오류로 판결났다. 또 오세영, 김재홍씨 등이 주장해온 '사설시조 기점론'과 1909년 8월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한반도'설, 최남선의 '태백산 시집'설, 김억의 '야반'설 등 자유시 효시를 둘러싼 여러 학설이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徐琮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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