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뭐니 해도 나에겐 주택 설계가 가장 의미 깊습니다" TV에 나온, 유명하다는 어느 건축가가 하던 말을 한참 동안 긴가민가하던 적이 있었다. 수십층 짜리 건물이 즐비한 세상, 그런 걸 설계해야 일할 맛도 나고 돈도 될텐데 어찌 저런 소리를 할까? 괜히 겸양 떠는 것 아닐까?
취재팀은 앞으로 당분간 양반 가옥, 왕의 궁궐, 서민들이 살던 집… 등 '주택'을 살필 요량이지만, 이 발걸음에 가장 먼저 달라붙는 궁금증도 이것이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주택을 짓는데는 많은 요소들이 작용한다. 터잡기부터가 주의를 요하는 것이지만 사회적 규제도 적잖았다. 경국대전 등은 조선시대 건축에서 1·2품은 대지 585평 및 건물 40칸 이하, 3품은 대지 390평에 30칸 이내, 서민은 대지 78평에 건물 10칸 이내의 집만 지을 수 있도록 규제했다.
기후는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남대 김일진 교수 저술에 의하면 안동권에선 ㅁ자 집이 많았다. 하회 양진당·충효당, 시가지 예안이씨 종택 등등. 추위와 바람이 그렇도록 만들었을 터. 반면 상주권엔 ㄱ자·ㄷ자형이 많고, 대구권은 一자형·二자형·튼ㅁ자형 등이 주류를 이룬다.
취재팀이 이번에 찾은 곳은 안동 임하댐 밑의 임하면 천전리 의성김씨 청계공 종택. 400년 된 집, 보물 450호이다. 이 종택은 사대부 가옥의 한 전형이고, 취재팀도 이 점을 살피려는 것이다. 청계공은 퇴계학파의 가장 윗머리를 차지하는 학봉 김성일선생의 아버지로서, 그 150여년 전 의성김씨들이 안동으로 입향한 후 아들들과 함께 가문을 크게 일으켜 세움으로써, 이 지역 씨족의 큰어른이 됐다.
청계공 종택은 배산(背山)하고 임하댐 물길인 반변천을 남으로 바라본다. 종손 가족들이 추정하는 전체 넓이는 1천200여평,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57칸이라고 했다.
이 집 역시 대부분의 사대부 주택과 마찬가지로 크게 4개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산쪽 가장 뒤편 높게 자리한 사당 공간, 일반 가족용인 안채 공간, 남자 주인의 생활 중심인 사랑채 공간, 작은 사랑과 3개의 마루 및 방·마굿간 등을 품은 문간채 공간 등이 그것. 그리고 그 각 공간은 '안마당' '사랑마당' '바깥마당' 등 독자적인 마당을 갖고 있었다.
ㅁ자로 된 안채의 서쪽에 사랑채가 위치하고, 안채 남쪽에 벌려 선 문간채와 사랑채 사이를 2층으로 된 누다락 건물이 연결, 전체적으로는 이들 건물이 ㄴ자로 안채의 서쪽·남쪽을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그때문에 사랑채 및 누다락 건물 연결선과 안채 사이에 독특한 '중간마당'이 생겨 있기도 했다.
그러나 문간채 더 밖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큰 빈터가 남아 있고, 거기에 1700년대 중반까지도 행랑채 건물이 있었다는 얘기로 봐, 이 집은 본래 5개의 공간으로 구성됐던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대문 역할을 하는 문간채 문이 실제로는 중문이고, 더 밖의 행랑채에 대문이 있었으며, 행랑채 바깥쪽에 연못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남자주인은 우선 행랑채 대문을 통과하고, 문간채의 중문을 지난 후 중간마당을 거쳐 안채 쪽으로 난 사랑채 문을 통해 사랑방에 진입했을 것이다. 반면, 외부 남자 방문객은 대문만 통과한 뒤 중문은 거치지 않은채 문간채 밖을 서쪽으로 돌아 사랑대청으로 들 수 있도록 돼 있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이 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랑채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짜리 반자 없는 맨천장(연등천장)의 대형 마루에선 화엄사 각황전 같은 거대한 목조건물에서나 느낄 수 있는 웅장미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남쪽으로 길게 선 누다락의 2층 통로를 통해 문간채 아랫 사랑방으로 이어지고, 특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통로가 아랫사랑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장치한 내려가는 나무 계단 역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주인은 사랑대청과 사랑방을 썼고, 나이든 그의 맏아들은 아랫 사랑방에 기거했으리라.
한참을 토론하던 종손 가족들과 안동대 김희곤 교수(한국사)는 어느덧 "ㅁ자 안채는 덧지어진 건물임에 틀림없다"는 일치된 추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ㅁ자 구성 중 북쪽 몸체 부분만 본래 안채였고, 남쪽 건물은 사랑채였으리라는 얘기. 그 뒤에 별도의 사랑채를 만든 뒤 본래의 안채·사랑채를 묶어 한개의 안채로 개조했을 것이라는 추론이었다. 그래야만 다른 사대부집과 달리 안방 문이 문간채를 향해 틔어 있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택 구성 외에도 이 집은 사대부 주택의 여러가지 특이점들을 갖추고 있었다. 집 뒤 후원 쪽에다 굳이 쌓아 올려 사랑채와 안채 사이를 막은 내외 담장, 임진왜란 이전 양식에만 나타난다는, 중간설주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열리는 창호문, 창호문 밖에 또 설치한 나무 덧문, 안채 동쪽 건물에 보이는 찬두, 10여㎝씩 차이를 둔 안채 대청의 3단형 구조 등등.
그러나 건축물이 어찌 그 자체로 온기를 지니랴. 역시 그 속의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잘 지은 건축물이라 한들 그 주인이 친일파였다면 결과는 어떨까? 이런 점에서 이 종택은 더욱 윤기를 얻고 있었다. 학봉 같은 큰 학자를 낸데 그치지 않고, 우리 현대사가 가장 어려울 때 그를 떠받칠 동량을 많이도 배출한 것이다. "종손만 남기고는 모두 독립운동 하러 만주로 갔었다"는 흔히 하는 단언이 그 명쾌한 설명. 남만주 우리 독립운동의 맹주였던 일송 김동삼 선생도 이 가문이 배출한 분. 그의 생가 역시 이 종택 옆에 맞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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