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20세기 문화(33)-팝 아트

입력 1999-04-17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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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미키 마우스, 통조림, 곡괭이, 청소기의 공통점은?'그렇다. 웬만한 독자라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들은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 미술계를 휩쓸었던 '팝 아트(Pop Art)'의 소재.

생활속에서 늘 접하는 대상을 유쾌하게, 때로는 저속하게 표현했던 팝 아트 작가들에게 기존 화가들의 전매 특허였던 삶의 고뇌와 철학,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은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작품속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한 생활이 위트와 유머, 페이소스로 뒤범벅돼 있다.

덕분에 비평가들로부터 '경박하다' '예술이 아닌 상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들 만큼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던 미술 흐름이 또 있을까.

60년대 서구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영화, TV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중문화에 기반을 둔 팝 아트.

그 최초의 작품이라면 영국 작가 리차드 해밀튼의 56년도 작품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꼽을 수 있다.

무대는 현대인들의 주거공간인 아파트. 그 곳에는 현대의 풍요로운 물질 문명을 상징하는 모든 것이 배치된다. 자신감 넘치는 남녀의 누드.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TV, 축음기, 만화 포스터에 포드사 로고, 전기청소기, 햄 통조림.... 어색한 표현기법이 우스꽝스런 느낌도 들게하지만 60년대 팝 아트가 다뤄갈 소재를 한 작품안에서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진정한 팝 아트는 20세기 대중문화의 본거지 미국에서 활짝 꽃폈다.

대표적 작가인 앤디 워홀(1930~87)은 예술작품에서 수공(手工)적 개념을 제거하기 위해 사진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기는 파격적인 작업을 선보였다.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믹 재거 등 세계적 스타들의 얼굴부터 토마토 수프 통조림, 상품 상자까지 그는 우리가 늘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식하지 못했던 자질구레한 사물들을 작품속에 옮겨 놓음으로써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고 현대적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예술작품이 아닌, 낯설고 경박스럽기까지 한 사진 이미지의 반복일 뿐일까.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마릴린'을 보자. 똑같은 마릴린 먼로가 나열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크 스크린을 거듭할수록 달라진다.

잉크의 농담이 틀리고 화장도 틀려진다. 똑같은 반복이란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작품이 예술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잘못된 화장처럼 입술선을 번져나온 립스틱 색상표현은 또 어떤가. 비뚤어지고 왜곡돼 저속한, 그래서 더욱 친근한 팝 아트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충분히 의도된 조악함은 고급스러움보다 순간적인 충격으로 인기를 끄는 현대 유행의 어설픔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워홀 자신은 그런 해석을 거부했지만).

워홀과 함께 팝 아트를 이끈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97)역시 작품성향은 달라도 이런 조잡함속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했다. 싸구려 만화의 한 장면을 확대시킨 작품을 주로 그렸던 그는 인쇄과정상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망점까지 꼼꼼하게 재현했을 정도.

만화소재 작품을 하게 된 동기도 그의 그림처럼 '농담'같다.

어느날 미키 마우스 동화를 읽던 아들의 '아빠는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릴 수 없을거야'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작품 '이봐 미키'를 제작, 팝 아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또 다른 팝 아트 작가들인 짐 다인, 로버트 인디애나, 톰 웨셀만, 클레스 올덴버그, 제임스 로젠퀴스트 등.

이들의 작품역시 일상의 흔해빠진 이미지를 무관심하게 감상자들에게 제시, 관객 각자의 심리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어떤 추상미술에도 뒤지지 않는 다의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金嘉瑩기자〉

■팝아트 대표적 작가 앤디워홀

'앤디 워홀'을 모를 수는 있다. 하지만 수십명의 마릴린 먼로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섹시한 웃음을 날리고 있는 그의 실크 스크린 작품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스타를 이용해 슈퍼스타가 된 화가'라는 말에 걸맞게 팝아트의 대표적 작가인 워홀은 생전에 대중적인 인기와 부를 함께 누렸다.

1965년 필라델피아 현대미술박물관에서 열린 워홀의 회고전 오프닝에는 4천여명의 애호가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미술관측은 만약의 사고를 우려, 결국 워홀의 작품을 치울 수밖에 없었다.

평론가들에게는 찬사와 멸시를 동시에 받은 그였지만 대중들로부터는 이처럼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체코 이민자 자녀로 젊은 시절 단돈 200달러를 달랑 들고 뉴욕을 찾았던 그는 먹고 살기위해 상업미술쪽에 발을 디뎌 백화점 디스플레이와 삽화에 손을 댔다. 이때의 경험이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유난히 스타를 좋아했던 그는 팝 아트 작가로 입지를 굳힌 후 영화제작에도 손을 대 주인공이 잠자는 모습만 6시간을 찍은 첫 영화 '잠'을 비롯해 75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롤링 스톤즈' 등 인기 그룹의 음반작업에도 참여, 활동반경을 넓혔다.

'팩토리(공장)'라는 작업실 겸 사교장을 만들었던 그는 평소 친했던 발레리 솔래니스라는 여성의 총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을 정도로 기이한 인물들과 결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상업미술가였다"는 말을 당당하게 외치며 '상품인가 작품인가'의 논란을 몰고 다녔던 워홀의 예술혼은 1987년 담낭수술 끝에 어이없이 사망하기전까지 계속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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