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건축의 미학-(14)담양 소쇄원

입력 1999-04-13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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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역사가 간혹 전혀 다른 이룸의 촉매제가 되는 수가 있다. 70년대의 언론인 집단 해고 사태는 그 이후 풍성해진 우리 출판문화의 뜀틀 역할을 했다. 선비들을 핍박했던 사화(士禍)도 훌륭한 문화 유산을 남기도록 아이로니컬한 역할을 했다.

이 시리즈 먼젓번 차례에서 살폈듯, 정암 조광조 등 개혁세력을 죽음으로 몰았던 480년 전의 기묘사화(1519)는 충재 권벌(權木發, 권발은 잘못된 표기임) 선생으로 하여금 봉화 유곡마을을 이루게 한 동인이었다.

이 사화는 전라남도 담양 땅에도 가장 전통적 정원이라는 '소쇄원'(瀟灑園, 남면 지곡리)을 남겼다. 주인은 소쇄옹 양산보(梁山甫, 1503~57). 정원 바로 밑 창암촌에 살던 사람이나, 13, 14세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의 정암 조광조 문하로 공부를 떠남으로써 정원 조성의 먼 인연을 엮었다. 그 3, 4년 뒤 사화가 모든걸 뒤엎어 버렸던 것. 정암은 유배도 양산보의 고향 남쪽 30여km 되는 화순군 능주로 왔다가 곧 죽임 당했다. 아마 이런 것을 인연, 혹은 운명이라 부르리라.

이렇게 해서 소쇄옹은 고향으로 은둔했지만, 그 고향은 소쇄원 같은 특별한 매개가 없었더라도 이미 문화적 요충이 될 인연을 품고 있었던듯 했다. '면앙정가' 작가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송순(宋純)은 양산보의 10세 위 외사촌형이면서 인근에 면앙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지냈다. 또 가사문학의 대표 격인 송강 정철을 청년기 10여년간 이곳에서 키워내다시피 해 외손녀 사위로 삼았던 김윤제(金允悌)는 두살 많은 그의 처남이었다. 그는 소쇄원 바로 건너편 '환벽당'이란 정자에서 활동했다.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인품가로 누구없이 공인했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은 양산보와 가장 많이 어울려 지내면서 사돈까지 맺었다.

이런 유명 인사들은 소쇄원 일대 20여리에 포진해 정자를 짓고 왕래했다. 사미인곡·속미인곡의 탄생지인 정철의 '송강정'도 그 중 하나. 소쇄원 바로 서쪽에는 송강의 '성산별곡'과 직결된 '식영정'이란 정자가 서 있고, 그 둘 사이에 62억원이나 들인 가사문학관이 내년 완공을 목표로 건립되고 있기도 하다. 이래저래 해서 한때 일대엔 정자가 70개에 달했다고 취재팀을 도와 준 담양군청 김방식씨는 전했다.

소쇄원 일대는 무등산 북면으로, 서쪽만 틔워 놓은 채 북쪽과 동쪽·남쪽이 산으로 둘러 막힌 무등계곡. 지금은 계곡을 막아 광주호가 만들어져 있지만, 옛적에는 계곡 사이로 동쪽서 서쪽으로 증암천이 흘렀으며, 일대를 모두 합쳐 '성산(星山, 별뫼)'이라 불렀다고 했다.

소쇄원은 무등계곡 도로에서 북편 산쪽으로 불과 70∼80m 가량 떨어져 있었다. 대나무 숲속 초입에 들면서 하는 생각은 "그렇게 유명하다니, 최소한 도심 큰 공원 만큼은 넓고, 평지에다 잔디도 잘 다듬어져 있지 않겠느냐"는 것. "부자 선비였다니 음풍농월토록 호화롭게 꾸며 놓았으리라"는 짐작도 마찬가지.

그러나 바로 이런 예감을 깨는 것이 소쇄원에 맡겨진 임무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곧이은 반성이었다. 잔디는 없었고, 평지도 아니었다. 그냥 산비탈. 그 사이로 계곡물만 흐르지 않았더라도 아무데서나 볼 수 있을 평범한 소계곡이었다. 넓지도 않아 담장 안에 담긴 면적은 다해야 겨우 1천400여평. 한눈에 다 들어오고도 남았다.

오히려 실망스러웠다. 뭣때문에 그렇게들 야단일까? 이렇게 썰렁한데?

그러나 그속에 한참을 머문 뒤에는 차츰 유홍준 교수가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일렀던 주의사항을 이해할듯 했다. "초보자들은 이름난 정자에 다다르면 건물부터 유심히 살피나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다. 누마루에 걸터앉아 주변을 조용히 보는 맛, 그것이 본질이다".

이번 시리즈 역시 유교수의 책을 따라 잡다한 설명은 버릴까 싶다. 자연 그대로 살려 축대를 쌓아 올린 구성들, 작은 계곡물을 다시 갈래 만들어 홈통으로 돌린 운치, 둥근 분위기 속에 네각 지어 만든 조그만 연못 두개, 그 밑에 앉기만 하면 봄잠을 졸게 할성 싶도록 담을 치고는 애양단(愛陽壇)이라 이름 붙인 다사로움, 불을 넣어 살 수도 있게 만든 정각 2개, 오만가지 의미를 주어 심고 가꿨다는 각종 나무와 꽃, 작은 계곡 위의 외나무다리, 특이하게 둘러친 ㄷ자 흙담… 그냥 있는대로 전하는 것으로 마칠 참이다. 기자도 이런 걸 느낀 뒤에야 '비 갠 뒤 해 나올 때 부는 청량한 바람, 맑은 날 비치는 달빛'을 뜻한다는 정원 이름이 느껴지는듯 했다.

흔히 서양의 건축이 자연과 대조되도록 하는데 반해 동양은 조화되도록 하며, 우리 일반 건축이 유교적 인공 질서를 중시해 직선적·기하학적인데 반해 정원은 도가적 자연성과 비형식성을 중시한다고 한다. 정원에서도 중국은 크고 웅장한 자연을 모방하며, 일본은 무수한 법칙을 집어 넣어 인공의 극치를 만드는 반면, 한국의 정원은 자연을 그대로 따라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민간 정원 중에선 소쇄원과 부용동 정원(보길도)이, 궁궐 정원 중에선 창덕궁 후원(비원)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이런 여러가지를 되생각코야, 아! 그런 뜻에서 소쇄원이 가장 전통적이라 하는구나 싶었다. 음풍농월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을 닦고 기르는 곳, 한국의 정원은 혹시 그 묵언(默言)의 공간은 아니었을까?…엉뚱하게 혼자 더 나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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