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IMF 새 풍속도

입력 1999-03-23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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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나라(?). 우리 사회의 음주문화를 빗대 표현한 말이다. 술 자리에서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탓인지 한국인은 세계에서 술을 많이, 빨리 마시는 국민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의 음주문화는 민족성 보다 급속한 경제발전, 불합리한 정치·사회구조 때문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단도 있다. 취한 세상에 혼자 맑은 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어서일까.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간지 1년4개월. 우리의 음주문화도 그간 구조조정의 과정을 밟고 있는 듯하다.

17일 밤 9시쯤 대구시 수성구 두산동 한 식당. 한 시간 전쯤 시작된 대구의 모 업체 영업팀 회식자리.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40대 중반의 팀장이 맥주잔과 소주잔으로 '제조(?)' 준비를 했다. 맥주에 소주를 탄 일명 '소폭'. 먼저 한 잔을 들이킨 뒤 다른 사람에게 권했다.

술자리를 함께 한 13명 중 누구하나 열외는 없었다. 그렇게 3순배. 모두가 거하게 취해 미리 예약한 인근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97년 연말까지만 해도 이들의 '2차 코스'는 가요주점이나 룸싸롱. 그 곳에 갈 때마다 양주 폭탄주로 취기를 올렸으나 이젠 '소폭'이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

젊은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ㄴ호텔 2층 술집. 공짜로 나오는 '팝콘'만으로 술을 마시는 손님들이 많았다.

안주를 시키지 않으면 눈총을 받지 않느냐고 묻자 홍모(30·은행원)씨는 "맥주를 마시며 굳이 비싼 안주를 시킬 이유가 있냐"고 반문. 종업원들도 이런 손님들을 개의치 않는다. 홍씨는 "적은 비용으로 특2급 호텔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어 이곳에 자주 온다"고 했다.

직장인들의 지갑이 얇아지면서 이른바 'IMF형 주점'을 찾거나 '1차'에서 술자리를 끝내는 경우가 늘어났다.

주당(酒黨)으로 알려진 공무원 안모(45)씨는 매주 2, 3회 꼴로 술을 마신다. 용돈이 줄어도 술 마시는 횟수는 여전하다. 안씨는 대신 값싼 술집을 발굴(?)했다. 소주에 안주는 돼지껍데기나 닭똥집. 친구 2~3명과 어울려도 2, 3만원 정도면 취기를 느끼기에 그만이다. 한때 유흥주점으로 친구들을 이끌고 가던 호기도 사라졌다.

경제난으로 값비싼 술집들이 영업에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IMF시대의 두 얼굴이랄까, 일부 고급 룸싸롱이나 가요주점은 평일에도 예약을 않으면 '룸'이 없을 정도다.

IMF체제가 전반적인 술 소비량을 줄인 것은 분명하다. 대구지방국세청의 통계를 보면 IMF체제 이후인 98년의 대구·경북지역 술 소비량은 25만9천518㎘로 97년 27만1천880㎘ 보다 4.5% 감소했다. 특히 소주 소비량은 42%나 증가한 반면 양주 소비량이 45.5% 줄어든 것은 음주문화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수치다.

술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건전한 음주문화는 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정신과 전문의 조호철(53)씨는 "술을 절제해 잘 마신다면 감정의 응어리를 풀 수 있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며 "조선시대 정도전은 마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술을 마시며 마을 일에 대해 토론하는 풍습을 만들자는 뜻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널리 시행할 것을 제언했다"고 했다.

조씨는 "빠른 시간에 많은 양의 술을 마시는 잘못된 음주문화는 정의와 원칙이 통하지 않던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관련 있다"고 꼬집었다.

〈金敎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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