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20세기 문화(27)-구로자와 아키라

입력 1999-03-06 14:05:00

지난해 말 국내 극장가에서 구로자와 아키라의 '카게무샤'를 만난 것은 야릇함을 넘어 묘한 전율마저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세계를 주무른 아시아의 거장. 그러면서 일본이란 틀 때문에 한국에선 '언더'에서만 접할 수 있던 그의 작품이 흐릿한 화면과 조악한 번역의 '불법 비디오'를 떨쳐 깨고 나온 것이다. 일본 문화개방의 첫 대열에 구로자와 아키라의 작품이 낀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는 일본영화, 나아가 아시아문화를 대표하는 거장이었던 것이다.

지난 90년 3월. 전세계 수억의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할리우드에선 아카데미시상식이란 호화로운 축제를 열고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계의 황제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두 사람이 무대에 섰다.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이들은 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소개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둘은 애정어린, 그러면서 경외감에 찬 목소리로 불렀다. "구로자와 아키라!좭. 세계 영화에 공헌한 노장들에게 주는 특별 공로상을 아카데미위원회는 80회 생일을 맞은 구로자와 아키라에게 주었다.

영화라는 백인들의 축제에 초대받은 황색거인,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1910~1998).

그가 있기전 일본은 세계 100여개국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키라로 인해 세계 영화계는 일본이란 나라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신호탄은 바로 51년작 '라쇼몽'(羅生門). '라쇼몽'이 그해 베니스영화제에 처음 공개됐을때 서구인들은 그 뛰어난 수준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을 수여했다.

'라쇼몽'은 숲속에서 벌어진 살인·강간 사건을 여러 등장인물이 각기 회상하는 미스터리기법으로 그렸다. 무사와 아내, 산적, 나무꾼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 다른 증언을 하고 이 증언을 추적하면서 인간 내면의 흉포함을 드러낸 작품이다.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원작 소설을 근간으로 한 이 영화는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하면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좭는 잠언같은 주제를 그려주고 있다.

일본적 정서에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과,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중심으로 한 배경음악, 아름다운 화면등은 서구인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라쇼몽'에 이어 54년작 '7인의 사무라이'는 전세계에 그의 추종자를 만든 흥행작이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주인을 잃고 방랑하던 사무라이들이 도적떼의 습격에 떨고 있는 농민들에게 고용돼 싸운다는 이야기. '7인의 사무라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장르인 사무라이영화를 혁명적으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라쇼몽'과 마찬가지로 가장 일본적인 사고에서 출발, 서구적인 사실주의로 발전시켰다. 많은 비평가들이 찬탄하는 원형구도나 긴박한 전투장면은 아키라를 '일본 영화의 천왕'으로 끌어올렸다. '7인의 사무라이'는 존 스터지스 감독에 의해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등 러시아 문학에 심취했고 문학, 미술, 정치,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이후 서양문화의 모티브를 주로 영화에 접목시켰다.

셰익스피어의 '맥베드'를 '거미의 성'(57년)으로, '리어왕'을 '란'(85년)으로 개작했으며, 반 고흐의 그림도 '꿈'(90년)에 녹여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서구 미학에 오염된 수출용 감독'으로 폄하되면서 영화제작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그러나 1950년대, 2차대전 패전으로 웅크린 일본인들에게 꿈과 희망, 미래를 던져준 인물은 천왕도 군국주의자들도 아닌 바로, 위대한 영화인 구로자와 아키라였다는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金重基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