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한 아이들을 도운 것이 아니라 고생을 나누기 위해 잠시 데리고 있었던 거지요"
지난 3일 김창희(76·대구시 남구 봉덕동) 할머니는 IMF 한파 이후 부모와 헤어진 '양손자'들을 데리고 동네 중국집에 갔다. 며칠전 초등학교 졸업식 때 우등상을 받은 둘째 양손녀를 축하하기 위해서다. 자장면 그릇에 머리를 박고있는 아이들을 눈물겹게 쳐다보던 할머니의 머리속에는 그녀가 키웠던 얼굴과 40여년에 걸친 고난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김 할머니가 첫 양아들인 수민(43·가명)씨를 거둔 것은 지난 56년. 결혼 첫해만에 남편을 여의고 경북 영천군에서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던 때였다. 동네 어귀에서 강보에 싸인채 버려졌던 수민씨를 집으로 데려왔던 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였으나 차츰 아이에 대한 정이 새록새록 쌓여갔다. 당시에는 고아들이 눈에 밟힐 정도로 거리에 넘쳤다. 차마 지나치지 못해 함께 거둔 '거리의 아이'들이 10명. 이들은 모두 할머니의 성을 이어받았다.
이후 김 할머니는 아이들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농사를 그만 두고 시장에서 노점상을 시작했다. 노점상 수입이 변변치 않자 의류 행상으로 전환,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떼온 옷가지를 가지고 전국 각지의 농촌과 공단을 누비며 20여년을 보냈다. 다행히 아이들은 큰 사고없이 자라 농민, 교사, 의사 등 훌륭한 사회인으로 자리잡았다. 할머니도 지난 80년대 중반 쯤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IMF 한파가 할머니를 비켜가지는 않았다. 양아들 수민씨가 직장을 잃고 개인사업을 시작했으나 할머니가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사업자금 1억원을 날린 뒤 자취를 감추었고 수민씨 부인마저 가출하고 말았다. 수민씨가 남긴 세 아이는 다시 할머니의 몫이 됐다.
할머니는 지금 봉덕동에 얻은 200만원짜리 전세방에서 손자·손녀들과 함께 살고있다. 영세민 생활보호자금과 전국 각처에 흩어져 살고있는 양아들 딸들의 도움으로 근근히 꾸려나가는 살림이지만 맏손녀(15)가 지난해 학급반장을 맡더니 둘째손녀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등 아이들이 명랑하고 건강하게 자라고있어 이것을 보는 것이 큰 낙이다.
김창희 할머니는 6일 대구시 남구청이 시상하는 '자랑스런 구민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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