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0돌…지역 항일유적지 답사

입력 1999-02-26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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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은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한 호국의 고장이다. 3·1운동 80주년을 맞아 불꽃처럼 타올랐던 항일운동의 자취를 찾아 영덕, 성주, 안동으로 가보자.

지역에서 항일운동이 가장 거세게 일어났던 곳인 영덕에는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 생가와 3·1의거탑등의 유적이 있다. 1896년 19세의 나이로 당시 영덕에서 활약하던 김하락 의병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시작한 신돌석의 생가는 축산면 부곡리에 있다.

말끔하게 단장된 두채의 초가집과 유허비가 평민출신 의병장의 활약상을 말해주고 있다.

신돌석은 1906년 3월에는 동생 신우경과 함께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 일월산에 본거지를 두고 영주, 영양등지를 오가며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 12월 현상금을 노린 부하에게 살해되기까지 신돌석은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장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생가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진 방면으로 5분정도 가면 나오는 3·1의거탑도 가볼만한 곳이다.

1919년 3월18일 영해 장날을 기해 영해, 창수, 병곡, 축산면 주민들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3일동안 시위를 벌였다. 당시 모인 군중이 1만명이 넘어 대구에 주둔중인 군인을 동원해 일제는 무차별 진압을 했다.

그날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영해면 성내4리에 세워진 기념탑에서는 영해시가지와 동해바다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성주는 심산 김창숙의 고향이다. 1879년 대가면 사월리에서 출생한 김창숙은 1909년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해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에는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작성한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청원서(파리장서)를 파리만국평화회담에 전달하려다 실패했다.

1921년 김창숙은 만주에서 신채호와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를 발행하고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서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으로 있던 1927년 상해의 병원에서 일경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김창숙은 두 다리를 못쓰게 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62년 세상을 떠난 김창숙의 뜻을 받들어 1974년 성주군청 뒤편에 심산기념관과 사적비가 세워졌으며 사월리에는 생가와 파리장서 초안을 작성한 백세각이 남아 있다.

유림의 고장 안동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항일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항일정신이 깃든 곳이다. 안동시 법흥동 낙동강이 굽이치는 언덕에 이상룡의 생가인 보물 제182호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이 자리잡고 있다.

1858년에 태어난 이상룡은 을미사변(1895) 후 김동삼, 유인식등과 함께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해 계몽운동을 벌였다.

한일합방(1910)으로 대한협회가 해산되자 이듬해 만주로 건너가 항일단체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1920년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무령의 중책을 맡아 독립운동을 지휘했던 이상룡은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2년 7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원래 아흔아홉칸으로 지어진 임청각은 1930년 일본이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일부를 철거해 지금은 50여칸정도만 남아 있다.

〈李庚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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