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문화-실존문학

입력 1999-01-30 14:05:00

전쟁과 허무… 상처 받은 자아 성찰 '그는 전쟁이 내일의 생활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학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다만 그녀와 감각의 흥분에 취하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이것이 그의 철학이다. 도덕이나 이상 따위를 믿지 않는다.

자유나 책임은 그의 사고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가 결국 자신의 의지로 행하고, 그 의지에 생명을거는 것은 군인이 된 뒤 독일군에게 포위당하고 절망 상태에 놓여질 때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죽는다'(사르트르 '자유의 길'중에서)

'그는 평범한 월급장이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날 바닷가에서 여자친구와 해수욕을 즐기고 희극영화를 보며 웃어댄다.

어느날 바닷가에서 말다툼을 하는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태양이 아랍인이 든 칼날에 부딪히자 그의 이마에 땀이 맺힌 것이다. 그는 태양과 땀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는 교화 신부도 거부한채 사형집행일을 기다린다.

감방 창으로 내다보이는 무관심한 하늘이 그의 인생에 대한 무관심과 일치한다고 생각돼 스스로행복감에 젖는다'(카뮈 '이방인'중에서)

나치즘과 세계 제2차대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대다수 사람들은 세계의 암울함에 압도당하고 부단히 위협받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고뇌하게 됐다. 전쟁과 죽음의 회오리속에서 신 혹은 이성적 사고는 존재를 지배할 수 없었다. 이성과 자유의 승리를 믿어온낙관주의적 가치관이 붕괴되기 시작됐다.

서양문명의 양대 축인 기독교문명과 이성에 대한 반성이 싹텄다. '존재' '불안' '모순' '부조리' '자유' 등을 주요 테마로 하는 '실존주의 문학'은 이렇게 태동했다.

사르트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인간은 절대적 자유를 가진다고 믿었고, 카뮈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생의 거부가 아닌 수용의 철학을 모색했다. 사르트르의 영원한 반려자, 보봐르는 인간은 타자에 의해 존재가 위협받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강변했다.

카프카는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는 현대인의 절망적 일면을 작품속에 상징적으로 담아내 프랑스실존주의 작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됐다.

독일출신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이른바 '고독의 3부작'으로 일컫는 '심판'(1925년) '성(城)'(1926년) '아메리카'(1927년) 등을 통해 인간생존의 고독함과 이방인적 심경을 다뤄 실존주의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파리 부르주아계급 출신인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는 생후 아버지와 사별하고 외조부 C·슈바이처의 슬하에서 자랐다. 열한살때는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의부밑에서 학교를 다녔고 명문 고등사범학교를 마쳤다.

철학교수로 재임하며 독일 유학시절엔 훗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몰두했다. 소년시절부터 교우를 맺은 폴 니장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차대전에 간호병으로 참전한 그는독일군 포로가 되기도 했다.

독일 점령하의 암담한 프랑스에서 전쟁과 허무, 인간존재에 대한 고민 등으로 그의 철학과 문학은 더욱 성숙했다. 1952년엔 자신이 창간한 '현대'지에서 '카뮈-사르트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그는 최초의 장편 '구토'(1938년)에서 자신만이 존재의 이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한 인간의 고독을 그렸다.

특히 미완성 3부작 '자유에의 길'(1945년)은 2차대전 당시 젊은이들의 동요와 내적고독을 독특한수법으로 그려냈다. 인간을 극히 모순에 차있고 불안한 존재로 봤지만,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있기에 자기 의지에 의해 모든 행동을 결정해 나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부조리 문학'을 주도한 알베르 카뮈(1913~1960)는 가난한 노무자인 아버지와 스페인계 하녀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1차대전 참전중 전사한 뒤 자동차 부속품상, 기상대 요원, 해운 중개인 등을 거치며 대학을 다녔다. 철학 전공으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지만 결핵으로 교수자격시험을 포기한 채 신문기자가 됐다.

대학시절 연극에 흥미를 가진 그는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반파시트 운동에 가담하고, 공산당에도 가입하지만 당의 정책변경에 실망을 느끼고 곧 탈당했다. 파리로 건너가 기자생활을 하던 중 2차대전으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신문사를 그만두고 다시알제리에서 사립학교 교사로 일했다.

'이방인'(1942년) '시지프의 신화'(1943년) '페스트'(1947년) 등 주옥같은 작품들은 이때 집필했다. '이방인'에서는 현대사회 매커니즘의 모순과 현대인의 부조리 의식을 날카롭게 지적했고,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는 현대인의 고독감과 인생의 모순을 파헤쳤다.

시몬 드 보봐르(1908~1986)는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파리 부르주아계급 출신. 그는 일찍부터 자신의 출신계급에 대한 분노와 앙심, 도피욕망을 느꼈다.

특히 그의 처녀작 '초대받은 여자'(1943년)는 인간의 근원적 자유의 문제를 탐구했고, '타인의 피'(1944년)에는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조건지워진 여러 규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실존의식이 깔려있다.

1929년 그는 교수자격시험에 함께 합격한 사르트르와 2년간의 '계약결혼'을 한다. 법적으로 부부라는 관계를 맺지 않고도 사르트르의 반려자로 일생을 함께 했다. 그의 실존주의 문학의 역작은1954년 발표한 '레 망다렝'. 프랑스 해방과 그 직후 정치참여시대의 자유와 책임 문제를 지식인동향을 중심으로 짚었다.

사상과 행동의 일치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실존에 관한 집요한 논리추구는 그의 문학활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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