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타계한 작곡가 윤이상씨의 정신적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루이제 린저(88)가 수상록 '운명'(바다출판사 펴냄)에서 윤씨 타계를 전후해 느낀 자신의 심경 등을 밝혔다.
윤씨와 린저는 75년 처음 만나 베를린 예술원 회원으로서, 그리고 인생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해온 동병상련의 동지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지냈다. 윤씨가 반정부 인물로 남한에서 배척당해 고향땅을 밟지 못한 것처럼 린저도 히틀러 시절 반나치주의자로 투옥되고 사회주의자로낙인찍힌 남편마저 강제 징용돼 전장에서 잃는 아픔을 겪었다.
특히 린저는 최근 몇년 사이 사랑하는 아들을 병으로 잃고 자신도 두번이나 큰사고로 병원신세를지는 등 가혹한 시련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터라 윤씨의 가슴아픈 운명과 죽음에서 받은 충격은더욱 컸다.
이번 책은 린저가 94년부터 97년까지 4년간 인생의 황혼을 살아가며 보고 느낀바를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장과 삶과 신 그리고 사회에 대한 깊고 날카로운 통찰로 써나간 것이다. 린저는 모두일곱 군데에서 윤씨를 회상해 자신이 얼마나 그를 아끼고 사랑했나를 보여주었다.
그는 95년 초에 쓴 명상일기에서 "중병으로 아파 누운 나의 친구 윤이상, 독실한 불교신자인 그는 '내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부처님께 기도합니다'고 말했다"며 병상의 친구에게 경외와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린저는 그해 11월 3일 윤씨의 딸로부터 부음을 듣고 "윤이상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였다"고 애도했다. 그는 "윤이상은 조국분단의 정치적 아픔을 겪어온 상처입은 용"이었다면서 "그러나 그 용은 영산의 봉우리에 오르지 못했다"며 그의 비극적 삶을 슬퍼했다.
린저는 윤이상을 처음 만난 때의 인연도 회고했다. 윤씨가 무명의 아시아 작곡가였던 75년에 린저는 그의 작품 '차원'을 레코드로 직접 듣고 그의 천재적 음악성을 처음으로 알아봤다. 윤씨도이런 린저에 대해 "당신은 나와 내 음악을 진정으로 이해한 유일한 사람입니다"며 깊은 감사를생전에 표시했다.
삶의 숱한 고비를 넘어와서인지 린저의 글에서는 삶에 대한 달관의 자세도 엿보인다. 동양적 정신세계에 매료된 그는 늘 태풍과 같은 삶을 살아오면서도 그 속에서 정적의 평화를 얻고자 했다.
윤이상이 타계한 뒤 그는 "날씨가 험악해도, 온 세계에서 답답한 정치뉴스가 날아와도, 윤이상이세상을 떠났어도, 나는 거대한 손 안에서 이상하리 만큼 포근하다"고 적고 있다.
윤이상의 인생역정에 감명받은 린저는 그의 전기인 '상처입은 용'(영학출판사)을 지난 88년 국내에서 출간한 바 있으며 이에 앞서 독일에서 이를 내기 위해 출판사 측과 끈질기게 싸우는 등 '친구'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린저는 윤씨가 타계하기한달여 전에도 그를 직접 찾아 쾌유를 빌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