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여 어민 생명선 끊겼다

입력 1999-01-26 00:00:00

"철수 시간을 불과 두시간 앞두고 그물 철거를 통보하다니 말이나 됩니까".

일본 오키 군도 부근에서 새우 잡이 중 한일 새 어업협정 부속협상 실패 소식을 무선으로 듣고급히 몸만 빠져 나오는 바람에 1억원을 들여 마련한 통발까지 포기한 포항 유원호 선주 김종오(47.장기면)씨. 박규석 해양수산부 차관보가 25일 구룡포에서 어민들과 간담회를 열자 참았던 분통을 터뜨렸다.

"전 재산을 투자해 산 그물…"이라는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울음으로 이어졌다. 갈길 바쁜 김 차관보를 붙잡고 "제발 그물만이라도 꺼내 올 수 있도록 해 달라"며 매달렸다.

만선의 꿈을 안고 30여 시간 항해 끝에 일본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도착, 조업하다 부속 협상실패 급전을 받고 나포를 우려해 그물.통발 등을 그냥 두고 나온 배만도 포항 28, 경주 10, 울진8, 영덕 3척 등 경북 동해안에서만 51척. 피해액이 30억원을 넘는다.

이날 김 차관보를 만난 어민들은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을 따지는데만도 한을 풀지 못하는듯 했다.

이번 협상의 옳고 그르고는 시비할 여유도 없는 것. "정부는 협정 발효 하루 전까지만도 '앞으로3년간은 종전 어획량을 유지할 수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조업하라'고 홍보했습니다".선주.선원들은 가슴을 쳤다. "그런데도 결과는 몇시간 사이에 그물 조차 거둬 나오지 못하는 상황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정부가 얼마만큼 이번 일에 소홀했는지 이것만으로도 증명 된다는 것.낙담.분노.허탈감… 한일 새 어업협정 발효 이틀이 지난 25일 동해안 항포구 곳곳의 어민들 표정은 한결 같았다.

25일 오후 포항수협 2층 회의실로 찾아 온 한나라당 해양수산 위원들에게 제3 성포호 선주 박영준(52)씨는 현재 상황을 "기름진 땅은 모두 다 잃고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꼴"이라고 했다. 이번협상으로 잃은 일본 근해는 기름진 땅, 남은 우리 연안은 고기가 거의 없는 황무지라는 것.경북도에 따르면 일본 근해에서 조업 가능한 20t 이상 도내 선박은 435척. 파악된 바 만으로도 그중 211척이 300여km나 떨어진 일본 근해까지 가 고기를 잡아 왔다.

그외에도 15t 이상 배까지 합하면 더 많은 배가 그쪽에 생명선을 대고 있었던 셈. 척당 6명씩 승선한다고 해도 2천500명 전후의 어민, 가족까지 합하면 1만여명의 어민 가족 생계가 당장 암담해진 것이다. 또 이들이 잡아 온 수산물을 가공.판매하던 인구까지 합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번사태로 충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충격은 어획고의 80% 이상을 일본 오키군도 해역에서 올려 온 50여척의 게 저자망 선주들이 더받고 있었다. 한일 실무협상 결렬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게자망 어업이기 때문."일본측이 게자망 조업 자체를 반대하고 있어 추후 실무 협상이 타결된다 하더라도 이 분야는 입어가 어려울 뿐 아니라 규제 또한 심할 것이 뻔합니다. 그물을 거둘 수밖에 없을 겁니다"경북 동해안 대게 생산량의 70%를 잡아 왔던 구룡포항 저자망 게잡이 어민들은 한일 새 어업 협정이 발효되던 지난 23일 그날, 이미 폐업 판결이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망연자실해 했다.12년째 자망어업을 해온 영덕 오대호 김동식 선장(49강구면)은"게 잡을 어장이 없어졌는데 배가무슨 필요 있느냐"고 반문했다.

동해안 주 어종인 오징어를 잡고 있는 채낚기 어선 선주들 역시 걱정이 결코 덜하지 않았다. 황금어장인 대화퇴는 물론 텃밭이었던 대마도 부근 등 어장 50%가 상실됐기 때문. 과연 어로 사업을 계속해야 할지 말지 삼삼오오 모여 연신 줄담배를 피워댔다.

"뾰족한 방법이 있어야지…"이흥수(44) 울릉군 채낚기 대형선주 협회장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긴한숨 뿐이었다. 전국 오징어 채낚기협회 전 협회장 하두조(60)씨는 "오징어 어장 피해만 연간 1천억원대를 넘는다"며, 이번 협정으로 인한 국내 전체 피해액이 1천390억원이라고 추계한 정부를답답해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연히 정부의 안일성으로 이어졌다. 울진 후포수협장 박유형(54)씨. "일본은 94년도에 200해리 UN해양법이 발표되자 곧바로 문제점을 파악, 원거리 조업선 보상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착수했으나 우리는 지금까지 그냥 지내왔다"고 했다. 생활을 거의 전적으로 어업에 의존하는 울릉도에서는 더 한심한 일이 벌어졌다. 군이 한일 어업협상 관련 자료를 제출하면서 채낚기 대형어선 69척의 명단을 누락시킨 것.

어업협정 자체가 우리나라에 불리하게 됐다는 지적과 재개정 요구도 쏟아졌다. 30년째 어업에 종사하는 영덕 김진학(54.강구면)씨는"공동 어로구역인 중간수역을 우리 영토인 독도를 기준 않고울릉도를 기점으로 하는 바람에 회유성 어종인 꽁치.오징어가 몰려드는 우리 어장을 일본에게 열어 줬습니다. 홍게 어장과 대화퇴의 절반 이상 및 북해도 해역을 일본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며발을 굴렀다. 특히 울릉지역 어민들은 독도 주변 12해리만 우리 해역으로 인정한 새 협정을 답답해 했다.

상권 쇠퇴를 우려하는 상인들 또한 고민이 역력해 보였다. 영덕대게 명성 하나로 번영해 왔던 강구항 상인들은"연안 대게로는 수요의 20% 밖에 충당하지 못한다""머잖아 게를 구하지 못해 문을닫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기아다, 한보다 하는 곳에는 몇 조원 씩의 혈세를 마구 퍼부으면서 어민들에게는 왜 별다른 대책 하나 아직 내놓지 않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34년 승선 끝에 3년전 17t 짜리 게자망을 겨우 마련했다는 구룡포 김모(62)씨는 "부채가 3억원이 넘어 전업 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수천년을 지탱해 온 동해안 항포구도 이제는 정말 기로에 섰습니다. 모든걸 잃어버린 상황 속에서 솔직히 살아남을 자신이 없습니다" 한 어민의 낭패감 젖은 이 말은 동해안의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단적으로 표현했다. 봄은 머잖았지만 동해안 지역은 더 추운 겨울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언제 깨어날 것이라는 기약도 없이….

〈경북동부지역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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