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남기행 (5)사과, 100년만의 진통

입력 1999-01-25 14:00:00

경북 출신 사람들의 고향 영상은 여느 지역 사람 것과 사뭇 다르다. 화면을 반도 넘게 차지해 또하나의 그리움을 보태는 것, 그것은 바로 사과밭.포도밭.감밭.복숭아밭... 과수원들이다.

생산액을 보면 화면이 더 또렷해진다. 경북도내 평년치 연간 생산액은 쌀이 1조2천억원 가량. 하지만 과일 역시 1조1천억원에 이른다.

결코 쌀에 뒤지잖는 비중. 그래서 경북 농업은 여타 지역과는 또다른 특성을 가졌다. 그리고 과일 생산액의 절반은 사과 몫. 이 사실을 모른다면 그는 경북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해도 좋다.

그러나 취재팀이 찾은 경북 북부지역 들녘. 거기서는 이 중요한 과일 농사, 그 중에서도 핵심인사과 농업이 100년만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봉화와 안동을 잇는 도로의 해발 500m 고갯마루인 '옛고개'를 넘던 취재팀은 영주시 평은면 오음리 연당골에서 대표적인 현장에 맞닥뜨렸다. 안동에서 시집 와 30년 동안 사과농사만 했다는 손정자(57)씨가 기둥 같이 굵은 사과 둥치를 톱으로 베어 내고 있었다.

"이 농사로 다섯 자녀를 키워냈지요. 하지만 작년엔 수재까지 겹쳐 2천평 사과밭에서 나온 것이도합 500만원도 안돼요. 내리 3년 농사를 망치고 나니 이제 방법이 없네요" 한 2년 고추 농사를지어본 뒤 다시 사과농사를 검토해 볼 참이라고 했다.

손씨만이 아니었다. 여름이면 사과꽃 향기로 마을 전체가 진동했다는 연당골 마을 곳곳의 사과밭들이 몇년 전부터 고추.담배밭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한때 나무 한 그루가 논 한마지기와 맞먹었다는 사과 농사. 그러나 흐르는 세월 만큼이나 무상하게 상황이 달라져 있는 것이다.

차를 몰아 청송지역으로 들어 서던 날 아침, 겨울 가뭄을 달래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곳곳으로뚫린 도로 덕분에 '오지'란 이름을 벗었다지만, 노귀재가 5cm도 안되는 눈에 막혀 버리는 걸 보면 "아직은 오지일 수 밖에 없구나" 싶은 지역. 바쁜 일정 탓에 주위 만류에도 해발 6백m의 이재를 두시간 넘게 걸려 넘어 현동면 도평리 과수 협업단지 회장 손계용(63)씨를 찾았다.

"여기서 사과 농사 지은 사람 치고 대구에 아파트 하나 장만치 않은 사람 없어요. 10년 전만 해도 가을만 되면 외지 상인들이 줄지어 들어와 동네 전체가 흥청거렸지요" 30년 넘게 사과 농사해온 손씨, 협업단지 회장이라는 손씨의 말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 수상쩍었다.

청송 일대는 경북 사과 농업의 새로운 메카로 부상한 지역. 대구 인근 경산 등에서 시작됐던 사과 농사가 1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북상, 70년대 이후 안동.봉화.영주 등 북부 지역을 주산지로 자리잡게 하는데 중심이 됐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현동면 도평리는 이른바 '꿀사과'로 더욱알려진 청송 사과의 고향.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해가 한시간 늦게 뜨고 일찍 지는 곳. 그저 산촌에 불과했다가 사과 재배로 축복받게 된 땅.

그런데도 지역의 핵심 사과 농꾼인 손씨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80년대 중반에는 6천평 과수원에서 연간 4천만원 넘는 소득을 올렸지요. 그러다 3년 전엔 총 판매액이 2천만원으로떨어지고 순수익도 1천만원 밖에 안됐습니다. 사과가 된다니까 멀리 전라도에서까지 심으니 돈이될리 없지요. 능금조합에서 적자까지 봐가며 주스를 만들고 수출을 해 값 지키려 노력했지만 생산량 자체가 해마다 늘어나니 중과부적이었어요"

상주시 사벌면 용담리로 발걸음을 옮겼던 취재팀은 이와 관련한 또다른 모습을 만났다. 사과가시원찮아지자 많은 농민들이 대신 배를 심었다는 것. 때문에 이곳은 '경북배'의 주산지로 부상해있었다. 넉넉한 들판과 낮은 야산이 이어지는 용담리에서는 어디서나 배밭을 만날 수 있었다.

"1천평에 1천만원 수입은 됐으니 한동안 좋았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상주 꿀배 사벌영농조합장 김치균(44)씨는 대체 과수인 배 조차도 어려워졌다고 했다. "작년에는 4천평 과수원에서 고작 2천만원 수입을 올렸습니다. 10년 동안 배밭 면적이 역내에서만 10배로 늘었습니다. 이제배 값이 사과보다 낮아져 버렸어요".

지난해 가을 15kg들이 배 한상자 값이 2만5천원으로 폭락하면서 사과 보다 몇천원 싼 가격 역전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상주배에 대한 평판이 좋아 수출만 이뤄진다면 그럭저럭살길은 있을 것 같습니다"...김씨가 내비치는 애착이었다.

그러면 경북의 과일농업, 쌀 절반 만큼이나 생산액 많은 경북 사과 농사는 이제 가망이 없는가?앞서 만났던 현동 손회장은 그러나 돌파구를 보고 있었다. 3년전에 상당 면적 심어 놓은 '신경북형 사과'가 그 기대주. "이젠 사과 농사도 예전 방식으로는 집안 망해먹기 딱 좋을 뿐입니다. 이새 품종으로 꾸미는 새 방식의 농사에 앞날을 걸고 있습니다. 생산성이 월등해 사과 값이 지금의절반 수준에서 형성돼도 수출 경쟁력이 있다고 믿지요"

새 형태 사과밭의 제대로 된 모습은 영주시 안정면 안심 1리에서 볼 수 있었다. 아직 넓게 확산되지 못한 농사법이어서 귀한 모습을 보려 몰려든 외지 차량들로 소백산 끝자락에 안긴 이 마을이 붐비고 있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라는 대로 합니다. 곧 좋은 결과가 있겠죠" 첨단 농사법을 택했다는 김준수(67)씨는 놀랍게도 농사에 대해선 왕초보였다. 대전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 생활을 하다가남들이 갈아엎는 사과에 남은 인생을 걸고 이곳에 찾아 든 사람.

하지만 김씨를 따라 들어선 그의 과수원은 탄성을 자아 내기에 족했다. 보기 좋게 줄지어 늘어선쇠파이프 지주대, 그 사이로 촘촘히 자리한 사과 묘목들. 나지막히 조성된 1만여평 사과밭은 차라리 인삼밭을 연상시켰다.

"올 가을 첫 수확이 시작되면 이 밭에서 최소 3억원은 벌 수 있을 겁니다. 다 자란 나무 높이가어른 키 보다 높지 않고, 땅속에는 물.비료 주는 파이프가 거미줄 처럼 설치돼 있습니다. 때문에노동력이 옛날 방식 과수원의 30%도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조밀하게 심은 덕에 수확량은 서너배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과수원에서 만난 영주시 농업기술센터 심훈(40) 계장은 김씨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준비하는 자에게만 미래가 있다'고 했던가? 공업 뿐 아니라 농업 역시 장래를 위해 통렬한 구조조정의 터널을 거치고 있는 중이었다. 경북 사과농업 100년만의 몸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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