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49)-80년대 여성단체 기류

입력 1999-01-15 14:02:00

80년대 대구.경북 여성운동은 지난 1981년 대구시가 경북도에서 분리,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때로는 연대감을 때로는 차별성'을 띠는 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가전제품의 등장으로 주부들의 가사노동이 경감되고, 이른바 '이경숙 사건'이 터지면서 주부의 집안일에 대한 금전적 평가가 논의되면서 여성의 집안일과 사회참여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것도 80년대의 산물이다.

효가대 김정옥교수(가정관리학)는 당시 '한국도시주부의 생활시간 구조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도시주부들의 육아.취사 등 가사노동량이 자녀취학전이 가장 많아서 무려 6시간 42분에 달한다고 보고했으며, 주부도 직업이라는 인식 아래 주부의 한달 평균 가사노동 가치는 최고 53만원으로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과 비슷하다고 발표돼 주목을 끌었다.

먼저 80년대는 우리나라 헌정사상 제도적으로 '여성정책'이라는 용어가 정착됐고, 법적인 정비가활발해지면서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여권에 대한 관심이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시기였다.유엔가입을 추진중이던 정부가 1983년 유엔차별철폐협약에 비준하면서 총리실 산하 여성정책심의위원회를 발족, 행정부내 여성정책수립과 부처간 여성관련 정책 조정기능을 맡다가 1988년에 종합적으로 여성정책 추진을 담당하는 정무제2장관실이 신설됨으로써 여성정책기구가 완비, 여성계는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제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전국 15개 시도에 신설된 가정복지국과 시군구 가정복지과는 여성들의숙원사업 가운데 하나였으며, 여성사회참여와 여성지위향상을 위한 외적 여건을 성숙시키는 계기였다.

초대 대구시가정복지국장 이현희(현 대구시상수도본부장), 경북도가정복지국장에 김금주(현 퇴직)이 임명됐고, 대구시 부녀복지과장에 이경순, 생활지도계장 이상욱, 손문숙(중구 가정복지과장) 신현자(동구〃) 김만희(남구〃) 유영희(북구〃) 설영숙(〃) 송영숙(달서구〃직무대리)등 직제 공포와동시에 타시도에 앞서서 유능한 공무원을 발탁하고, 적재적소에 승진 발령하여 여성계는 크게 환영했다.

이로써 89년의 가족법 개정, 모자복지법 제정, 공무원 임용시행령 개정, 90년의 영유아보육법, 특수대학에 여학생 입학허가(10% 이내) 등의 조치는 종전까지 특수계층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던여성정책을 일반여성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성전담 행정기구가 발족되면서 외적성장은 성숙해보였지만 실효성은 그에 훨씬 못미치는 한계점도 불거졌다.

87년에 남녀고용평등법이 발효되면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 및 대우의 보장과 모성보호를 명시, 88년부터 시행됐지만 기업들이 선언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여성조기정년제는 그대로 적용됐고,동일노동 동일가치는 발동되지 않았다.

따라서 영남대 여직원들이 25세 조기정년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시작, 경북산업 여직원, 경북대 여직원 등의 문제로 퍼져나갔고, 90년대 이후 차별적인 여행원제 폐지, 기업체 결혼각서제 폐지, 조기정년체 철폐로 결실을 맺게 된다.

1981년에 단행된 행정개편에 따라 대구시가 경북도에서 떨어지자 경북도여성단체협의회로 묶여있던 여성단체들이 대구지회를 신설하기 시작, 대구시여성단체협의회(초대회장 전경화)가 1982년 7월에 창립되면서 대구지역 여성운동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이후 여협의 위상이 퇴색한 것과는 달리 80년대 대구지역에는 여성유권자연맹, 소비자연맹, 대한어머니회, 한국가정법률상담소대구지부, 상록봉사단, 걸스카우트대구연맹, 국제소롭티미스트중앙클럽, 한국부인회대구지부, 한국꽃꽂이대구경북지부, 미망인회대구지부, 주부클럽대구지부, 꽃예술작가연합회, 대한어머니회대구지부, 한복협회, 미용사협회, 어린이육영회경북지회, 경북부녀의용소방대연합회, 통일여성안보회 등 단체설립이 러시를 이루면서 가사에 함몰된 고학력 여성들을 사회봉사와 여성운동으로 이끌어냈다.

대구여협은 언론인 출신의 초대 전경화회장이 여성의 지적향상을 위한 사업, 소비절약 및 여성저축 증대를 위한 간담회를 열면서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지위향상에 대한 기반을 조성했고, 제2대최동원회장은 여성지도자간의 교류에 역점을 두면서 대구여성 신년교례회를 도입하고 여성수첩을제작.배포했으며 여협 정관을 제정하였다.

제3대 김도연회장은 도예전 수익금 2천만원으로 여협 사무실을 개설하는 성과를 올렸고, 사회변화의 흐름을 앞서 파악하면서 여대생 사회참여 훈련 세미나를 통해 고학력 여성의 사회진출을 유도했는가 하면 여성상담실을 개설했다. 제4대 조화자회장은 30여년만에 부활될 지방자치제를 앞두고 지방의회내 의석할당제 쟁취를 위한 가두서명(89년)등을 펼치면서 여성들의 정치입문을 준비해나갔다.

세계일류수준의 여성정책, 여성행정기구를 갖고도 사회전반을 관통하는 유교적인 마인드와 운용은 미흡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진보적인 여성단체들이 속속 개설돼, 성폭력추방, 페놀오염사건, 가족법 개정을 포함한 여성지위향상과 여권옹호에 앞장선다.

주부아카데미협의회(86년), 애린회(대구 여성의 전화 전신, 87년), 대구여성회(88년), 함께하는 주부모임(88년)은 창립초기부터 대구지역 여성조기정년실태조사, 대구지역여성교양프로그램조사, 영남대 여직원 조기정년 철폐투쟁지원, 대현파출소내 경찰관 성윤간사건, 경북산업대결혼퇴직철폐운동에 적극 개입하면서 본격적인 여성운동의 장을 펼쳐나간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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