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3일째 변칙처리 안팎

입력 1999-01-08 00:00:00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7일 오후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하고 있는 가운데경제청문회 국정조사계획서와 문화산업진흥기본법 등 3개법안을 기습처리했다. 이날 이들 안건을변칙으로 처리하는 데는 고작 30여초만이 걸렸을 뿐이다.

이날 의장석만 점거하면 여당의 단독처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한나라당의원들은 변칙처리가 끝난후 여당의원들을 향해'날치기'를 외치며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반면여당은 야당측의 날치기주장을 의식한 듯"과거정권처럼 야당 모르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날치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적법처리를 주장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원들이 지도부의 본회의장 진입결정이 내려진 후 행동을 개시한 시각은오후 5시20분쯤. 양당 사무처직원들과 보좌진들이 본회의장 입구를 막고 있던 한나라당 사무처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사이 양당의원들은 양쪽 출입문을 통해 일제히 본회의장으로 진입했다.중앙문 돌파조가 한나라당쪽과 몸싸움을 벌이는 사이 의원들의 입장이 거의 완료되는 전형적인성동격서(聲東擊西)식 전술이 구사된 것.

여당의원들이 본회의장에 포진한 후 의장석을 점거하고 있던 한나라당 의원들과 곧이어 고성이오가는 입씨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국회 사무처직원들이 의원수 점검을 위해 명패를 일일이확인하자 한나라당 백승홍(白承弘)의원은"난장판인데 명패확인은 왜하느냐"며 사무처직원들을 거칠게 몰아붙이기도 했다.

여당의원들의 행동은 곧바로 이어졌다. 5시35분쯤 국민회의 장영달(張永達)의원이 "이제 의장석으로 올라갑시다"라고 작전개시를 선언하자 국민회의쪽 의원들이 일제히 움직이면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이때 좌석에 앉아있던 김봉호(金琫鎬)부의장이 슬그머니 일어나 핸드마이크를 꺼내면서 기습 처리가 시작됐다.

국민회의 의원들에 둘러싸인 김부의장이 핸드마이크로 "제7차 본회의를 개의하겠다"고 선언하자한나라당의원들은 일제히 날치기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서훈(徐勳)의원이 국민회의쪽 의석을 가로질러 김부의장을 제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백승홍의원은 법안뭉치를 허공에 날리면서 항의하기도 했다.

결국 김부의장이 30여초만에 안건처리를 마친뒤"이런 상황에서는 회의를 계속할 수 없다"며 산회를 선포했고 본회의장을 빠져나가는 여당의원들을 향해 한나라당의원들이 "날치기는 무효다","똑바로 정치해"라며 소리쳤지만 허사에 그치고 말았다.

…이날 안건처리전 여야간에 경제청문회와 서상목(徐相穆)의원 체포동의안을 놓고 절충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권수뇌부가 체포동의안은 유보하더라도 국정조사계획서는 반드시 처리한다는 방침을 정하자 국민회의 한화갑(韓和甲)총무와 자민련 구천서(具天書)총무는 박준규(朴浚圭)국회의장에게 이같은방침을 전해 오후 2시쯤 3당총무회담이 박의장 주선으로 열렸다. 이자리에서 3당총무는 체포동의안 유보와 청문회 증인채택을 3당이 협의한다는 원칙에 합의해 박희태(朴熺太)총무는 4시까지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의총과 이회창(李會昌)총재를 만나고 온 박총무가 오후 4시40분쯤 합의안 대신국회529호실 사건에 대한 여권의 선사과를 요구하면서 합의는 무산됐다.

이를 근거로 여당측은"한나라당 박총무가 합의사항에 대한 결론이 안날 경우 여당마음대로 해도좋다고 말했다"며 기습처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이날 여당의 단독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전날밤부터 본회의장 농성을 벌이고 전사무처직원과 보좌진을 동원했는데도 기습처리를 허용하자 망연자실한 표정. 의원들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채 말을 잇지 못했으며 일부 의원들은 "의회민주주의의 조종이 울렸다"며 흥분했다.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규탄대회에서 이회창총재는"여러분이 주먹에 맞고 쓰러졌지만 우리의 의지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며 "엉터리 민주주의를 뜯어고치기 위해 싸우자"고 결의를 다졌다. 이어 본회의장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의원들의 울분이 쏟아졌다.

김덕룡(金德龍)부총재는"우리 투쟁목표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며 "투쟁대열을 정비하고 모든 투쟁방법을 동원해 싸워나가자"고 말했다. 또 김형오(金炯旿)의원은"우리가 죽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살지 못한다"면서 "이제 자랑스럽지 않은 의원직을 던지자"고결의를 내보이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총재는 이어 국회총재실에서 긴급총재단회의를 열어 향후대책을 논의, 본회의장 농성을 계속한다는 당론을 결정했다.

…이날 청문회 국정조사계획서 처리 등 여당의 기습처리에는 자민련측의 강경입장이 주도적인역할을 했다.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국민회의는 여야충돌이 벌어질 기습처리에 다소 미온적이었으나 오후 본회의 진입전에 열린 양당 수뇌부간 대책회의에서 자민련측이 강경입장을 견지했다는후문이다.

조세형(趙世衡)총재권한대행이 이날 조사계획서처리 연기의사를 비쳤지만 박태준총재는"지금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이 떠들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계속 청문회를 미루려고 하느냐"며 국민회의측을 압박했다는 것이다. 〈李相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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