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상담 창구서 본 98'
IMF 한파가 엄습한 98년. 최악의 경제난으로 단란했던 가정이 위기로 치달았다. 가정문제를 전화로 상담하는 기관엔 실직, 부도를 당해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가장들, 남편 대신 생계를 꾸리려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가정불화에 시달리는 주부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이 쏟아졌다. 전화상담 창구에 투영된 무인년의 자화상은 '가정해체'란 말로 집약되고 있다.
'여성의 전화'(전화 475-8082~3)엔 올해 5천여건의 상담전화가 걸려와 예년에 비해 20% 이상 늘었다. 1월초 문을 연 '1366 가정위기 상담전화'(국번없이 1366)에는 한달 평균 상담전화가 80~1백여건이었으나 하반기 들어 1백60~2백여건에 이르는 등 갈수록 상담전화가 급증했다.상담 실적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경제난에 따른 가정 폭력, 부부 및 부모와 자녀간 갈등 등가정문제를 의논하는 전화가 부쩍 많아졌기 때문.
가장 두드러지게 많았던 유형은 역시 실직, 부도로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가장들의 울분섞인 항변과 호소였다. 직장을 잃은 한 50대 남자는 "부인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물론 자녀들까지 합세해아버지를 괄시, 죽고 싶은 심정뿐"이라고 털어놨다. 단지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남편,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된 사연이 잇따랐다.
실직을 당한 남편 대신 주부들이 취업을 하면서 불거진 가정문제를 상담하는 전화도 많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남편이 이유없이 부인을 때리거나 심각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심지어 의처증으로 부부간 갈등이 악화됐다는 사연도 적지 않았다. 한 남성은 "바깥일을 하는 부인이 바람을피우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다"고 호소했고, 다른 한 주부는 "무턱대고 의심을 하는 남편 때문에가정을 지키기 어렵다"며 상담을 요청했다.
특히 레스토랑 전화방 등지에서 윤락을 하다 불륜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주부들도있었다. 실직, 부도를 당한 뒤 무작정 집을 나간 남편이 오랫동안 생사불명이라는 전화, 일자리를구하기 어려워 생계가 막막하다는 여성 가장들의 전화도 잇따랐다.
그러나 눈물로 얼룩진 전화상담 창구에도 웃음을 짓게 하는 미담도 없지 않았다. 1366 가정위기상담전화 채종현씨(40.여)는 "부인의 외도를 알게 된 남편이 이혼을 하지 않고 상담전화를 통해가정을 지켰을 때엔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여성의 전화 최은숙 사무국장(33.여)은 "올해엔 경제난에 따른 가정해체 현상이 매우 심각했다"며"어려움이 닥칠 경우 가족끼리 고통을 나누는 방법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가정을 끝까지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직자쉼터에서 비친 98
9개월전인 지난 3월초 이모씨(42)는 막 문을 연 '남구 희망의 쉼터'를 찾았다. 변변한 직업 없이목욕탕 관리일을 하던 이씨는 기름값 인상 여파로 해고당한 뒤 무작정 쉼터를 찾았던 것.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아내와 자식들과 힘겹게 살던 이씨는 실직상태에 접어들면서 간장 하나로 밥을 먹어야 할 정도로 곤궁한 생활을 하게 됐다. 교통비를 아껴 담배를 사려고 쉼터까지 매일 1시간 30분가량 걸어서 출퇴근 하곤 했다. 그러나 6월들어 공공근로가 시작되면서 이씨는 일자리를 얻어희망의 쉼터를 떠났다.
박모씨(49)도 실직의 아픔으로 한동안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20년이상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박씨는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뒤 아침에 눈을 뜨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아내가 식당일을 해 근근히 생계를 꾸려나가긴 했으나 실직의 충격과 자괴감 속에서 괴로워 했다. 박씨 역시 쉼터 동료들의 위로에 힘입어 우울증을 극복, 일자리를 얻어 재기하게 됐다.
남구 희망의 쉼터에는 지난 봄 매일 20~30여명이 찾아와 30여평의 사무실이 비좁을 정도였다. 실직자들은 앞날에 대한 절망으로 웃음을 잃은 채 실의에 빠져 있다 차츰 서로를 위로하며 기운을차리게 됐다. 같은 아픔을 지닌 이들은 누구보다 끈끈한 정을 다지게 됐다. 쉼터로 날아든 구인정보에 매달리다가 누군가 한달짜리 일자리를 얻어 나가면 대봉교 다리밑에서 소주파티를 벌이며환송회를 벌여주기도 했다. 이들중 일을 구하는 사람들이란 '일구회'를 조직, 무료급식소의 안내일을 맡는등 자원봉사일에 나서기도 했다.
쉼터의 실직자들에게 재기의 길은 험난하다. 구직정보실을 통해 들어오는 일자리는 일주일이나 2,3일의 짧은 임시직에 불과하고 하루 12시간 중노동을 강요하는 노동착취형 업체도 있어 이들을상심케 한다.
지난 봄에 비해 요즘 희망의 쉼터를 찾는 이들은 하루 10여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리어카 행상을하다 병에 걸려 쉬고 있는 현모씨(45), 알미늄섀시 제조업체에서 일하다 실직한 이후 부양가족이없다는 이유로 8개월째 나오고 있는 미혼의 김모씨(26)등이 쉼터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고 있다.이들은 당장 취업을 기대하진 않으나 재기에 대한 의욕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찾아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희망의 쉼터 이호준 소장은 "쉼터를 찾는 이들이 초기에 비해 안정을 되찾아 다행"이라며 "실직자들에 대한 사회제도적 문제점도 많으나 이들 스스로 앞날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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