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섬유 밀라노서 배운다(2)-시스템과 장인정신

입력 1998-12-22 00:00:00

"이탈리아 사회는 특유의 마피아식 사고로 뭉친 철저한 '아미고(프렌드십) 소사이어티'입니다. 여기에 속하면 무조건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독식은 없습니다. 이것이 이탈리아의 장점입니다"밀라노 한인회장 이수길씨는 이탈리아가 친분관계로 유지되는 철저한 '안면사회'임을 강조했다.때문에 이탈리아는 지방색이 두드러진다.

밀라네즈(밀라노인) 로마노(로마인) 나폴레따노(나폴리인)식으로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닌다. 때문에 고향을 떠나기 싫어한다. 대도시로 몰리기 보다 고향에서 직장을 구하고 고향에 묻히길 원한다. 이탈리아인이 미국에 2천5백만명이나 살고있지만 대부분 나이들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도친구나 선후배들이 고향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경영도 가족이나 친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가족이나 친척이 중심이 된 기업은 중소기업일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소기업이 뭉친 조직이 길드(조합). 길드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실제 몇년전 제일모직은 이탈리아에서 부도 염색공장을 인수하려 했으나 길드(조합)가 모금에 나서 그 기업을 살리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탈리아에서 사업을 하려면 길드에 소속되지 않으면 안된다.

밀라노 인근 비엘라 지역의 의류회사 프랑코 페라로도 가족들이 경영하고 있는 가족회사. 페라로씨가 경영을 맡고 아들은 영업, 부인과 두 딸은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난해 대구컬렉션에 참가한 적 있는 페라로씨가 만드는 옷은 하이패션이 아닌 중저가품인 어패럴 개념의 브랜드.

그는 봉제공장에 의류전시장을 두고 주문을 받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전시회 이후에도 바이어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옷을 만들어 팔 수 있어 재고부담을 줄일 수 있는 시스템이다. 재고부담이줄면 옷값을 낮출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프랑코 페라로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모든 의류회사들이 갖추고 있다.

밀라노의 패션 디자인 산업이 파리패션의 하청기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디자인 기술보다는 이러한 마피아식 시스템과 상술(商術)을 가졌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박동준씨는 "파리 패션이아직도 예술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밀라노 패션은 실용성을 중시한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파리 패션은 일반인들이 쉽게 소화할 수 없지만 밀라노는 일반인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판다는 것이다.

프랑코 페라로사가 원단을 공급받는 곳은 이탈리아 최대 모직회사인 로로 피아나. 역시 비엘라지역에 있는 이 회사의 공장은 제직과 염색시설을 갖추고 있다. 캐시미어는 몽고 울란바토르에서,최고급 양모인 타스마니어(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에 있는 섬이름에서 따옴)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염색기·제직기·연사기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지만 로로 피아나사의 시설은국내 모직공장과 별 차이가 없었다.

동행한 조양모방의 민웅기 사장은 "소메트 직기는 대구에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캐시미어를 브러싱하는 기모기(모직표면의 털을 세우는 기계)에서 특이점이 발견됐다. 기모기중 브러싱의 부품이 플라스틱이 아니라 천연열매처럼 보였다. 회사를 안내하던 영업담당 세바스티아노 무쏘씨에게 무슨 열매냐고 묻자, 그는'까르도'라고 말했다.

까르도는 스페인과 사르데냐에서만 생산되는 열매. 조양모방의 민사장은 "로로 피아나의 숨은 노하우로 보인다"고 말했다.

천연소재는 직물제조뿐 아니라 의류제조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유명브랜드 체루티 1881의 봉제공장 히트만사는 양복의 심이 들어가는 부분에 말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말총심지가 들어가면 세탁해도 옷의 원형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생산담당 이사인 시시티 루이제씨는 "베네또 지방에 말총심지 제조회사가 있다"고만 밝힐 뿐 더이상 상세한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히트만사는 컴퓨터로 봉제공정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종 봉제공정에는 대부분 나이 든 남녀 종업원들을 집중 배치, 다림질 등 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삼성의 하티스트 공장에서 6년간 일했다는 시시티 루이제 이사에게 삼성과 히트만사의 시스템을비교해달라고 주문하자, "시스템의 차이는 없다"면서 "품질은 경험에서 좌우된다"고 강조했다. 히트만사 종업원의 평균 근무경력은 20~25년. 종업원 대부분은 공장이 위치한 앗사고 지역 주민들.아버지에 이어 아들·딸들이 계속 근무하고 있는 가족도 많았다.

봉제기술자들의 급여가 기계·금속·전자직종 보다 낮지만 고향을 떠나길 싫어하는 이탈리아인특유의 '수구초심'이 장인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장이었다.

〈曺永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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