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작년 12월18일 대선에서 승리, 첫 여야 정권교체의 문을 연지 일년이 지났다. 자민련과의 공동정권이란 한계속에서 IMF사태라는 국가 부도직전의 상황을 안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병행추진'이란 구호를 내걸며 숨가쁘게 달려왔다.
이제는 외환보유고나 무역수지, 환율, 금리 등 경제수치면에서 환난은 다소 극복된 인상을 주고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은 김대통령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IMF사태의 결과였지만 그 사이에 수많은 은행들이 문을 닫고 통폐합되는 금융개혁이 있었고 또 재벌 해체에 버금가는 재벌 구조조정합의도 최근 있었다. 정리해고가 법제화되었다. 공공부문의 개혁도 지금 진행중이다.
이 과정에서 대량 실업사태가 야기, 사회불안요인으로 등장했고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빈부격차가더욱 심화되는 어두운 면도 동시에 노정되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김대통령이 고집스럽게 햇볕정책을 밀고 나갔던 것이다.
김대통령의 통치스타일도 특징이 있었다. "대통령이 혼자서 일을 한다"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로특유의 카리스마를 행사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을 추진할때 야당식의 명분 축적과 여론 압박을 통한 헤게모니 장악수법을 사용했다.
재벌개혁도 일년을 지켜본뒤 여론조성을 통해 백기를 들도록 했고 노동단체들의 파업도 파국에따른 우려를 홍보하며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해갔다. 야당에 대해서도 정권초기 "IMF상황이니 일년은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가 여의치 않자 반년이 지난후에 단숨에 여소야대를 깨버렸다.통치스타일은 경제제일주의에 의한'현실주의 노선'을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주의 노선은 대외정책에서도 드러났다. 미국이나 일본방문시 해외투자 유치, 환난 극복에 정열을 쏟았다. IMF사태 촉발에 영향을 끼친 일본에서는 2차대전후 처음으로 세계에 대한 일본의평가를 함으로써 일본인들을 고무시켰고 과거사 종식, 문화개방, 천황 호칭과 일왕 방한초청 등줄 것은 거의 전부 다 내주다시피 했다.
다만 경제개혁의 경우 너무 IMF나 미국의 주문에 따르다가는 장래 과연 경쟁력있는 경제체제로바꿀 수 있을 지는 아직 의문부호다. 물론 부도직전에서 우리가 선택할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사태를 관망하는 여유가 아쉬웠다.
김대통령은 대북문제에 있어 남다른 정성을 기울였다. 잠수정 침투 등 다양한 북한의 도발에도개의치 않았다. 금창리 지하핵시설의혹이 제기되었을때는 굳건한 한미공조에 의한 해명의지를 밝혔으나 "완전히 규명되기 전까지는 기존의 햇볕정책을 변화시켜서는 안된다"며 오히려 미국정부측을 설득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북한 김정일의 근본적인 태도변화가 없으면 큰 고비를 맞게 될 게 확실하다.그런 면에서"너무 조급하게 서둔다"는 비판론자들의 조언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정쟁으로 얼룩진정치권의 한해는 김대통령으로서는 마이너스로 남아있다. 내년초부터 시작될 자민련의 내각제공세를 어떻게 차단할 지도 주목된다. 그리고 호남 편중인사에 대한 불식 실패로 지역감정을 크게 치유하지 못한 게 흠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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