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들의 IMF 1년

입력 1998-12-09 00:00:00

IMF 태풍에 이어 지난 2월 정리해고가 법제화됐다. 한계상황에 직면한 기업들은 장기적인 안목에 따른 경쟁력 강화보다 당장 효과가 있는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을 단행했다.

지난해까지 2%대에 머물던 실업률은 올초 4.5%대를 돌파한 뒤 가파른 상승세를 거듭, 지난 9월7.3%에 달했다.

실업자는 1백57만8천명으로 지난해 11월 57만4천명에 비해 꼭 1백만4천명이 늘었다. 평생직장을떠나가는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들의 희비가 교차했다. 노사분규가 급증했고 일부 사업장에서는물리적 충돌까지 벌어졌다. 힘겹게 버텨온 근로자들의 IMF 1년을 돌이켜본다.

▨떠나간 실직자들.

대구인력은행에는 직원이 아닌데도 매일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5~8명정도. 직원들보다먼저 도착해 문열기를 기다렸다가 문닫을 무렵 슬며시 사라지는 사람들. 마땅히 갈 곳이 없다보니 일자리도 알아볼 겸 매일 나온다.

입구 옆 흡연실은 이들의 지정석. 사실 이들은 구인표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자기들끼리어디선가 듣고온 일자리 정보가 더 믿음직하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이들에게 구인표를 들여다보는 것은 오히려 시간낭비에 가깝기 때문이다.

"공중전화 옆에서 구직자들이 문의전화하는 걸 들어보면 우습지도 않아요. 벌써 사람 구했다는데도 '혹시 더 필요하지 않습니까'하며 매달리거든요"

일자리에 초탈한 사람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기다리면 직장도 구하겠지요'라고 말하는이들이지만 속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공공근로사업, 재취업교육, 실업자대부 등 갖가지 실업구제책이 발표됐지만 이들의 움추린 어깨를추스리진 못했다. 3·4분기 대구경북에서 5만8천9백여명이 노동청 고용안정기관을 통해 재취업의사를 밝혔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일자리는 1만1천3백여명분에 불과했고 그나마 취업에 성공한사람은 4천7백명뿐이었다.

실직이 장기화되면서 생계에 위협을 느낀 이들은 금융기관 대출창구로 몰렸다. 올들어 지역에서1만1천여명에 이르는 실직자들이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대출자격을 인정받았으나 정작 금융기관에서 대출한도액 5백만원을 받은 사람은 5천여명에 불과했다. 상환능력이 의문시되는 실직자들에게금융기관이 대출을 해 줄리 만무였다.

지역중견업체 과장이던 장모씨(42)는 "실직자를 마치 사회적 불구자로 취급하는 현실이 무엇보다힘들다"며 "연말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지만 내년이 문제"라고 말했다.

▨남아있는 근로자들.

현실의 냉혹함은 살아남은 근로자들에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주지않은 채 거세게 몰아쳤다.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 8월 상용근로자 10인이상 업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월평균 임금총액은 1백36만5천원. 지난 3월만 해도 1백40만6천원이던 것이 임금교섭의 터널을 지난 뒤 96년 수준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한국노총이 최근 밝힌 자료는 고달픈 근로자들의 삶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산하 58개 노동조합 1천3백62명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월평균 소득이 58만5천원 감소했으며 가구당 대출에 따른 이자부담도 30만5천원에 이른다는 것.

대구경북지역 주력업종으로 제조업의 47.4%를 차지하는 자동차부품 등 조립금속업종과 35.1%를차지하는 섬유관련업종의 불황으로 지역 근로자들의 고통 부담은 더욱 컸다. 총액기준 임금인상률에서 전국 평균은 마이너스 2.7%인데 반해 대구경북은 마이너스 3.7%로 전국 최하위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근로조건은 더욱 열악해졌다. 올해초 근로자들의 월평균 근로일수는 21.6일, 주당 근로시간은 36.8시간이었으나 지난 8월 근로일수는 23.7일, 근로시간은 40.7시간으로 늘었다. 근로시간 증가폭을 감안한다면 근로자들의 임금 하락폭은 통계치를 훨씬 웃돈다.

지역유통업체 모간부는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마지 못해 쥐꼬리만한 월급이라도 받고 사는 형편"이라며 "살아남았다기 보다는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더 가진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갈등속의 노사관계.

구조조정의 여파속에 노동조합과 사용자간의 갈등의 골도 깊어졌다. 대구지역의 경우 지난해 1건에 불과하던 노사분규가 6건으로, 쟁의발생은 9건에서 22건으로 증가했다. 민주노총이 주도한 지역 총파업이 지난 5월과 7월 2차례 벌어졌으며 월평균 근로자 집회도 4건을 넘어섰다.집단적인 움직임이 없던 건설직, 전기설비직, 골재채취직 근로자들이 잇따라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정리해고의 칼바람 아래 상대적으로 생산직보다 열세에 놓여있던 사무기술직 근로자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해 오리온전기, 한국합섬, 한국전자 등에 복수노조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같은 움직임이 '경제회복을 위한 구조조정'이란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수많은 근로자들이 길게는 1개월이상 파업을 벌이는 등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결국 이들에게돌아온 것은 다소 줄어든 정리해고 숫자와 더 큰 폭으로 줄어든 월급봉투 뿐이었다. 특히 공공부문 등의 구조조정이 마무리되지 않은 데다 대기업 빅딜로 인한 잉여인력 12만여명에 대한 대책도없는 상태에서 해를 넘길 전망이어서 내년 노사협상에서도 진통이 예상된다.

그나마 지난 10월부터 시작된 지역의 노사화합 움직임은 내년 노사관계 전망을 다소 밝게 한다.이미 10여개 업체가 체육대회, 등반대회를 통해 노사간 갈등 해소의 길을 열었으며 연말까지 30여개 업체가 각종 노사화합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지난달 28일 한국노총대구지부, 대구경영자협회, 대구지방노동청, 대구시 관계자 약 1백명이 참가한 '노사정 한마음 등반대회'는 99년 신노사문화를 만들어 낼 하나의 계기가 될 전망이다.

대구지방노동청 이종호 노사협력과장은 "98년 임단협은 한마디로 근로자들이 고용안정 확보를 위해 임금, 근로조건의 악화를 감수한 것"이라며 "내년에는 경기회복과 더불어 한층 성숙된 노사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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