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편 대한부인회경북도본부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곳은 대구시지부.
대구시지부는 '대구 대한부인회'로도 불렸는데 그 조직이 오늘날 여성단체 저리가라 할 정도로완벽하게 짜여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
초대 지부장 이명득(민족시인 이상화 형수)을 노복선(초대 대구시부녀계장) 한신덕 (대성가옥 김문근 회장 장모)이 부회장을 보필했고, 그 아래 △ 총무부 (부장 이옥분, 정신과 전문의 이근후 박사모친) △ 조직부 (부장 송금순, 백구세탁소 운영) △ 계몽선전부(부장 오경신) △생활개선부(부장 정복향·경북 초대 대구여성회관장, 전 국회의원) △원호부(부장 이명숙·부민치과의원장 부인) △재정부 (부장 남동순· 현 한국부인회 명예회장, 삼일동지회 고문) △근로사업부(부장 김오종) △문화부(부장 김송배)로 조직을 구성했다.
김일조(신현확 전 국무총리 장모) 김정조(호동원 전규용 원장 모친) 박광선 세사람이 감사를 맡았고 이사회는 매월 5일 오전10시, 부장회의는 매월 5일 오전9시에 열려 어려운 가운데 직능에 걸맞은 활동을 펼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예를 들어 원호부의 경우 일선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위해 예술학교 학생들을 동원해서위문공연을 하고, 명절이나 연말이면 위문대를 수없이 만들어 일선에 보내는 등 자신의 힘이 미치는대로 동분서주하며 말보다 실천을 앞세웠다.
원호부장 이명숙은 초창기 여성운동의 숨은 공로자로 영어에 능통, 수복 후 유엔군이 왔을때 그들과 의사소통을 너무 잘해 유엔군조차 놀랐으며 조그만 일이라도 자신이 희생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남들앞에서 실천하는 선구자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조직은 있고 사무실은 없어서 자연히 초대회장 이명득(李明得·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수)의 서성로 자택(현 조흥은행 서성로 지점 뒤)을 이용하였다.
이명득은 남편 이상악 (李相岳·동양염직창설자)과 사별한 중년에 여성운동에 눈을 떠 당뇨로 눈이 멀어지기 전까지 계속 계몽·구호활동을 폈다.
이명득은 큰 사랑채를 아예 군인들에게 제공해서 쓰게 했고, 집에서 기르는 닭도 매일 몇마리씩잡아서 장병들에게 대접하는 등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고, 온 자녀들이 어머니의 사회봉사 뒷바라지에 나섰다.
"전방부대에 위문갈 때 시댁 과수원에서 사과를 한 고빼(화물차 한량)씩 실어 보냈다"고 회고하는안귀동씨(이명득의 며느리·전 경대병원장 안두홍의 누나)는 시어머니가 피난민이 쏟아져 들어올때 대한여자청년단과 함께 대구역 구내 화차 한칸을 얻어서 거적대기를 깔아놓고 산모의 출산을도왔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예산지원이 전혀 되지 않던 때라 이명득은 대구 친정으로 피난온 맏딸 무희씨 (육당 최남선의 맏며느리)와 함께 다방을 해서 번돈까지 구호활동에 썼다.
이명득은 전쟁통에 문을 닫고 있던 문운당(文運堂)서점(지금의 정안당 안경점 옆)의 책장을 돌려놓고 집에 있는 응접세트에 고가구 몇 세트를 보태 대구서(大邱署) 공식 다방허가 제2호 희망다방의 주인이 되었다.
'희망'(希望)다방이라는 이름은 육당 최남선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었으며, 미군을 상대로 캔들케이크에 슈크림, 프렌치 후라이 등도 팔았다.
신용을 큰 자본으로 번 돈을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쓰고, 나중에 서울 출판사를 차려 문화사업에도 공헌하였다.
개인적으로 이승만박사를 존경했던 이명득 대구 대한부인회장은 강한 성격과 탁트인 성품으로 누구보다 소신껏 순수하고 헌신적으로 일했다.
딸 무희씨의 영향으로 불교신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명득은 싯달유치원(현 서문교회 자리)을 운영했고, 이 유치원을 판돈에 주머니돈을 보태 친구 몇분과 함께 화성양로원을 운영했고, 대한적십자사 부지사장까지 지냈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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