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부터 꼭 56년전 경북 성주군 금수면 어은1리 적산이란 마을에서 4남2녀의 맏딸로 태어났다. 적산마을은 80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지만 당시 어느 마을처럼 대부분 가정들은 가난한 농가였다. 우리집도 마을에서 최하층의 극빈자는 아니었지만 부모님과 여섯 남매가 살기에는 어려운 집이었다. 부모님이 부지런하고 오빠들도 성실해 큰 풍파만 없다면 그런대로 평화롭게 살 수있었지만 내가 아홉 살 때 어머니께서 중풍으로 몸져 누으면서 우리 집은 불행한 가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큰 오빠는 경찰관, 작은 오빠는 부산에서 유아복 공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객지에 있었고 셋째 오빠와 남동생은 집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농사일을 했다. 어머니가 자리에 눕고 보니 시집간 친척언니가 가끔 집에 와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해주기도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눈물을 머금고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나는꼬마 소녀였지만 어머니대신 주부노릇을 했다. 밥짓기며 집안 청소, 빨래 따위도 제법 잘해서 아버지와 이웃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기도 했다.
적산 마을에는 작은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 후로 성당에 다니기시작했다. 성당에 다닌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하느님(천주님)께 기구해서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하고 옛날처럼 우리 아버지가 웃는 얼굴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몸이 고단하고 집안일이 바빠도 새벽에 성당을 찾아 기도를 올리면서 어머니의 회복을 소망했다.나는 어머니만 건강해진다면 수녀가 돼서 일생동안 천주님을 모시고 살겠다고 기도했다. 그 당시의 소원은 지극하고 지극해서 하느님도 감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풍이란 병은 한 번 걸리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어머니는 8년간 자리에 누워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던 나였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왜 그렇게 슬펐는지 모를 일이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무리 정들었던 친부모라도 중풍으로 수년간 대소변을 받아내다가 돌아가시면 마음 한편으로는 부모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그렇지가 않았다. 만약 어머니가 중풍에 걸렸더라도 오래만 사신다면 시집같은건 가지 않고 일평생 병간호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의 어머니는 조부모가 살아계실 때 지극한 효부였고 시부모님께 불효하면 천주를 섬기는 마음도 거짓이라고 늘 강조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 중퇴를 하고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겠다고다짐한 것도 그런 교육덕분일 것이다.
가족 모두가 초등학교정도는 졸업해야 한다고 중퇴를 말렸으나 나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버지가 농사일로 들판에 나가신후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의 대소변이 방바닥에 엉망으로 퍼져있으니 그걸 보고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하느님 곁으로 떠났을 때 친척들이나 마을 사람들은 비록 중풍을 앓다 세상을 떠났지만한도 원도 없을거라고 했다. 성실한 남편이었던 아버지가 지성으로 어머니를 돌봤고 딸은 효녀여서 당신의 대소변을 받아냈으니 그보다 더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니 주위 사람들의 말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야 될텐데 한동안 홀가분하기는커녕 어머니를 따라 죽고 싶을 때가 가끔 있었다.
이후 나는 부산에 가서 둘째 오빠의 공장일을 도우면서 독학으로 초등학교 과정를 공부했다. 세월이 흐르니 어머니를 향한 그리운 마음도 조금씩 퇴색돼 갔다.
어느덧 내 나이가 혼기에 이르렀고 아버지와 오빠들은 혼처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게는이미 점찍어둔 혼처가 있었다.
우리 마을 적산에서 10리쯤 북쪽으로 가면 속칭 상후로 불리는 어은2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내가열아홉살 때 상후에서 북쪽으로 5리쯤 떨어진 매봉산으로 혼자 산나물을 뜯으러 갔었다. 매봉산은 김천시와 성주군의 경계로 산이 높고 산나물이 많이 나는 곳이다. 고사리, 도라지, 귀쑥따위나물을 그날따라 엄청나게 많이 뜯어서 나물 보따리는 작은 바위만 했다.
석양무렵에 나물 보따리를 이고 하산하려는데 소나기가 쏟아지는게 아닌가.
나는 나물봇짐을 안고 큰 바위밑에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소나기는 한시간쯤 쏟아지다가 그쳤는데 그때 산에는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나물봇짐을 이고 산밑에 왔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 졌다.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때 천우신조였을까. 어떤 총각이 풀짐을 땅에 내려놓고 쉬고 있었다.그 시절 우리 고장에는 토질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 떡갈나무잎, 감나무잎, 도토리 나뭇잎, 버드나무잎들을 가지째로 베어서 논에 넣었다. 수건으로 땀을 닦던 청년이 나에게 쉬어가라며 나물봇짐까지 내려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산속에서 만난 청년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청년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아가씨 조금도 두려워 마소. 나는 상후마을에 사는 배이만이란 사람이오. 아가씨는 어느 마을의 아가씨인기요?"
나는 그제서야 조금 안심을 하고 "저는 적산에 삽니더" 했더니 "적산에 살면 아무개 아무개씨가사는 마실 아닌기요. 적산과 상후는 같은 어은리인께 아가씨는 무서워말고 나를 믿으소" 했다.우리들은 잠시 쉬었다가 고개를 하나쯤 넘었다. 청년은 고개밑 논에 나뭇잎을 골고루 깔더니 비게 된 그의 지게에 나물 봇짐을 얹으라고 했다. 사양했더니 반 강제로 지게에 얹고는 같이 가자는게 아닌가.
상후 마을까지 왔을 때 나물봇짐을 달라고 했더니 "과년한 처녀가 밤중에 적산꺼정 우째 갈랑기요. 나만 믿으소" 하고 그의 마을에서 멈추지도 않고 십리길 적산까지 봇짐을 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는 마을 앞 저수지까지 와서 나물 봇짐을 내 머리에 얹어주고 잘가라고 말한후 왔던 길을쏜살같이 가버렸다.
저수지에서 우리 집까지는 가까워서 단숨에 올 수가 있었다.
이후 밤중에 산속에서 혈기넘치는 젊은 남자의 몸으로 처녀인 나를 보호해주고 나물 봇짐까지 져다준 그 청년에 대한 고마움은 사랑으로까지 변했다.
나는 큰 오빠에게 우리의 사연을 이야기했고 오빠도 하늘의 뜻이라며 승낙했다. 도시의 좋은 곳에 나를 시집보내겠다는 오빠들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나는 22세때 배이만 청년에게 시집갔다.
나의 남편인 배이만씨의 당시 가정형편은 오빠들이 반대할만큼 어려웠다.
남편은 삼형제인데 모두 고용살이를 했고 그의 부친도 젊었을 때 고용살이를 했을만큼 찢어지게가난했다. 상후는 적산보다 더 산골이었고 시집온 친정보다 몇배 더 가난했었다. 나를 데려다 주고 떠나시던 아버지가 눈물을 흘렸고 나도 새 엄마가 있지만 나와 이별해 살게된 아버지가 불쌍해서 울었다.
시동생 둘은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했지만 효자였고 형수인 나에게 너무도 다정하게 대해 줬다. 남편이 나를 끔찍히 사랑해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가끔 남편에게 농담을 하곤 했다.
"아이구 못난 양반이지. 산속에서 어두울 때 나를 만나서 손목도 못잡아 보고"하고 내가 놀리면남편은 이렇게 대답한다.
"맘속으로야 자네 가슴을 불끈 끌어 안아보고 싶었지. 그러나 자네가 거절을 하고 집에 가서 자네 오빠들에게 일러주면 난 맞아죽을 거 아이가.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기라" 우리는 이 말을할 때마다 웃곤 했었다.
남편 삼형제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우리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쥐꼬리만한 새경(일년 품삯)으로는 더 좋아질 수가 없었다. 나는 시집살이 하는 동안 출천지 효부라고 농협중앙회에서 주는 효행상을 받기도 했다.
한가지 어려웠던 것은 시가족들이 부처님을 섬겼기 때문에 시동생 둘이 한사코 나에게 개종을 하라는 것이었다. 내 말이라면 콩을 팥이라 해도 따르는 시동생이었지만 이 일만큼은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어느날 두 시동생들은 나의 성경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겉으로는 부처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시동생들 몰래 친정마을에 있는 성당엘 가서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시동생 둘이 혼인한 후 우리 둘은 대구로 나기기로 합의했다. 우리가 못해본 공부를 아이들에게시켜보고 싶은데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날 때였고 시부모님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직장에서 심덕좋고 일 잘한다고 늘 칭찬을 들었다.
나도 식당일이며 공장일을 닥치는 대로 해 우리의 가세는 농촌에 있을 때보다는 월등히 좋아졌다. 딸들은 고교를 졸업시켜 시집을 보냈다.
아들 둘은 아버지처럼 효자였고 성실했다. 큰 아들은 빨리 군대에 다녀와서 취직해 우리 부부를편히 모시고 동생을 좋은 대학교에 보내겠다고 했다. 큰 아들을 보면 꼭 저의 아버지 젊었을 때를 보는 듯 했다. 그 아이는 고교만 졸업하고 대학교는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저의 형제가모두 대학교까지 공부하면 늙으신 저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염색 공장일은 엄청나게 힘든 중노동이기 때문이다.
체력이 쇳덩이같은 남편도 잔업, 특근, 야간작업 따위를 쉴새없이 하기 때문에 자다가도 헛소리를했다. 학교 문앞에도 못가보고 어릴 때부터 머슴살이 하다가 늙어서 염색공장 근로자 노릇하는저의 아버지에 비하면 자신은 엄청난 호강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자다가 아버지가 헛소리를 하면큰 아이는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작은 아들도 효자여서 아버지의 팔다리를 밤늦게까지 주물러주곤 했다.
큰 아이는 저의 결심대로 고교를 졸업해서 군대도 잘 다녀왔고 어느 플라스틱 공장에 취직해서아버지 못지 않은 성실한 근로자가 됐다. 두 부자가 벌고 나도 벌고 보니 우리집 가세는 한결 호전됐고 작은 아들의 대학진학도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됐다. 나는 천주님께 더도말고 덜도말고이만큼의 평화와 안식을 오래 누리게 해달라고 늘 기도를 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천주께서도 불가항력의 한계가 있는지 모른다. 5년전 5월달 큰 아들이 엄청난 안전사고를 당한 것이다. 플라스틱 제품을 트럭에 싣고 천막을 덮은후 고무밧줄로 동여매다가밧줄이 끊어져서 아들이 뒤로 넘어졌던 것이다. 이 사고로 아들은 척추를 다쳐서 하반신을 쓰지못하게 된 것이다.
청천벽력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곧 혼인 시키려했던 아들이 대소변을 받아내야될 불구자가 되다니 믿을래야 믿어지지 않는 이런 불행이 있단 말인가. 어려서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던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기에 늙어서 자식의 대소변을 또 받아내야 한단 말인가. 하느님께 악을쓰며 원망하고 통곡도 해봤다.
남편도 미친 사람같이 이성을 잃고 독한 소주를 폭음도 했다.
5년간 아들의 병을 고치겠다고 별별 노력을 다해봤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신은 절대주라서 우리인간이 착하게 살고 당신께 귀의해서 열심히 기도만 한다면 모든게 만사형통할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께 배신당한 걸로 생각하고 한동안 하느님을 원망하며 성경책조차 멀리 했었다.반대로 병을 고치겠다고 굿도 하고 점도 쳐보고 별별 좋다는 약을 다 써봤으나 아들은 여전히 불구였다. 아들이 다니던 공장도 부도로 문을 닫고 그나마 산재보험 덕분에 계속 입원할 수 있었다.천벌을 받을 고백이지만 나는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질 때보다 아들이 누워있는게 몇배 더 슬프고 충격이 컸다. 눈물도 더 흘렸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친지들이나 고향 사람들이 아들을 혼인시킨다고 청첩장을 보낼 때마다 내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병원 침상에 앉아 있던 아들이 성경 한권을 손에 들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 우리 인간이 세속적인 혼인을 해서 아이 낳고 사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걸 난 깨달았어요 제가 그런 것보다 더 큰일, 더 보람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은 주실 것이란 확신이 들어요"
그때 아들의 얼굴은 너무도 평화스럽고 기쁨으로 가득 차 보였다.
"아무 능력도 없는 하느님을 너는 믿는단 말이냐?"
"어머니, 이런 말이 있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예요"
"그래서?"
"그게 만고 진리예요. 하느님이라고 해서 무조건 전지전능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사고나던 그날튼튼한 밧줄로 짐을 묶었던들 사고는 나지 않았을거예요. 회사의 관리인이나 제가 한 번만 더 살피고 다른 줄로 대체했다면 사고는 없었을 거 아니예요, 어머니"
나는 큰 망치로 얻어 맞은 듯 했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바르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있는 능력이 있지 인간 자신이 잘못하는 것까지 따라다니면서 이래라 저래라 일일이 고쳐주지는못한다는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일해야만 부자가 되고 위생관념이 철저해야 건강해지며 안전사고에 철저히 유의해야 사고예방이 된다는 것만이 하느님의 가르침 아니겠는가.
만약 우리 인간이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고 안전사고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채 아무렇게나 일한다면 하느님인들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부지런해라, 착한 사람이 되라, 공장에서 일할 때 일분일초도 안전사고에대한 생각을 버리지 마라, 그러면 너와 네 집에 평화와 안식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들은 누구도 원망않고 하느님께 귀의하겠다며 나몰래 어느 친구에게 부탁해서 성경책을 가졌고열심히 하느님 말씀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자고권하는게 아닌가.
나는 그 순간 뜨겁고 감격스러운 눈물이 흘렀다. 이제 나와 아들은 하느님의 큰 품에 안겨서 모든 슬픔을 잊고 새출발 했다. 아들의 휠체어를 끌고 주일마다 하느님께 갈 때보다 더 기쁜 적이없다. 굳세게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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