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42)-경북도 부녀계(하)

입력 1998-11-13 14:02:00

경북도 부녀계가 1949년 1월부터 1966년에 이르는 15년 동안 개설과 폐지, 부활과 폐지, 재부활의탈바꿈을 거듭하면서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부녀들의 지위향상과 생활개선이 불가피하다는 시대적결론에 다다랐다.

경북도 부녀계가 개설되고 20년만인 1969년 4월1일에는 드디어 부녀계가 부녀아동과(아동계.부녀계, 초대과장 별정직 사무관 김도연)로 승격되는 발전을 보이면서 오늘날 여성발전의 밑거름이 될각종 정책수립과 곤궁한 시대상을 헤쳐나가기 위해 투쟁 아닌 투쟁이 시작됐다.70년대 부녀행정은 새마을운동과 식생활개선 처럼 일반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 윤락여성선도나전쟁미망인을 위한 직업보도, 부녀복지관련 기구.기관의 신설운영 등으로 압축된다.계에서 과로 승격한 이듬해인 1970년 6월 보건사회국 산하 여자공무원의 유기적 협조와 새마을어머니회의 체계적인 선도를 위하여 부녀지도협의회를 구성하고 부녀조직을 새마을어머니회로 일원화함으로써 부녀행정은 강력한 추진력의 날개를 달았다.

70년대 부녀행정의 대표적 성공사례는 '식량자급자족을 위한 감자 주식화 사업'과 '물동이 해방운동'. 70년대초 경북 의성 신평마을에 간이상수도 통수식을 가질 때의 일이다. 부녀자들이 일일이 우물에서 물동이로 물을 길어쓰야하는 번거로움과 중노동에서 해방시키기위해 설치된 간이상수도 통수식에서 축하테이프를 끊는 순간 맑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자 부엌에서 이를 지켜보던신평마을 부녀자들이 난데없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추우나 더우나 온식구들이 먹고 마실 물을 길으러 공동우물까지 나가야만 하던 중압감이 안마당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따라 확 걷히면서 해방의 울음이 터져나온 상징적인 사건이다.

당시 경북도 부녀아동과장이던 김도연씨(전 대구시의원.영생애육원장)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구조적 모순은 심했으나 예산.물자가 귀해 부녀행정을 펴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정책적 배려가 전제되는 오늘날과 비교가 안될만큼 일선 담당자들의희생적인 노력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전국에서 경북이 가장 잘한다는 평가를 들은 감자주식화사업을 펼때는 청와대에서 조리버스를 한대 마련해주었다. 감자 조리버스는 대여섯명이 탈 수 있는 앞쪽, 휴게실로 꾸며진 중간, 사방조리대로 꾸며진 뒤쪽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한국식생활개선연구회 왕준련회장이 걸죽한 말솜씨로 감자요리를 설명할때면 부녀자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드는 귀한 구경거리였다.

1971년 6월에는 각 시군에 부녀아동계가 설치되고 대구시에는 부녀아동과(초대과장 김화경)로 승격되었으며 1971년 1월24일 여성복지증진의 전당인 여성회관(대구시 남구 대명동)을 개관, 교양강좌.기술교육.숙박제공.취미교실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실시하였다.

여성회관은 본래 경북도 대구시가 1967년 11월에 여성의 질적 향상과 복지증진, 특히 불우한 여성을 교화선도하고, 자립기반을 조성할 목적으로 대구시 남구 대명동에 부지 1천587평, 건평 415평의 현대식 2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건립하였다.

경북도 여성회관 건립에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 여성회관의 건립 필요성은 절실한데도 불구, 재정이 돌아가지않아 감히 착수할 생각을 하지 못하던터에 1965년 3월대통령 영부인 육여사가 KG홀(현 대구시민회관 자리)에서 자선의 밤을 열어 얻은 수익금 67만원이 여성회관 건립의 종자돈이 된 것이다.

여기에 대구시가 북성로 소재 대한부인회관을 매각(7백만원)하고 도비 보조(5백만원)를 얻어 총 2천7백만원으로 본건물 공사를 완성한 것이다.

대구시에 속해있던 당시 여성회관(초대관장 정복향)에는 부녀상담부, 교화선도부, 기술교도부, 숙박부의 4개 사업부를 두었는데 특히 사업실적이 가장 뚜렷한 것은 기술교도로서 1968년에 1천336명, 1969년에 1천27명의 기술습득자를 배출시켰다.

이후 '대구시 여성회관'은 경북도내 여성의 광장으로 명실공히 그 구실을 다해야한다는 결론이내려져서 '경북도 여성회관'(71년1월)으로 개칭됐고, 내무부의 사업소 통합방침(1973년 1월26일)에의거, 부녀상담소와 아동상담소를 흡수하여 '경북도 부녀아동회관'으로 명칭이 변경됐다.1978년 1월17일에는 구미시 공업단지 근로여성교육을 위한 구미부녀복지회관(초대관장 김도연)이개설되어 근로여성의 복지증진을 위한 기관으로 활용되던 중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돼 떨어져나가면서 전국 여성회관의 효시였던 경북도 여성회관은 1983년 10월자로 폐지됐다. 〈崔美和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