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평범한 여성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조그만 막창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벌써 1년이 넘었구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 서글퍼질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또 먹고 살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던 길이었는데 이제 오십줄에 접어드니 많은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세상도 많이 변했고 저또한 달라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 모두 그것을 지키려고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저또한 그것을 깨닫고 지켜나가는 동안 세월이 제 인생의 절반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저는 74년에 중매로 만난 남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23살. 남편은 저보다 세살이많았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친정에서 보냈던 하루는 잘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밤부터내리던 눈이 그치지 않는겁니다. 내리 사흘동안 퍼부어대던 눈이 뜸해지자 남편과 시댁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문을 열어주시는 시어머님께 인사도 여쭙기 전에 시어머님께서는 저희들을 크게 나무라셨습니다. 구정동안에, 그것도 사흘씩이나 친정에 머물렀으니 어머님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시어머님은 남편이 신을 벗기도 전에 바지를 걷어 올리라는 불호령을 내리셨고 제 남편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심하게 맞았습니다. 홀어머니 밑에 외아들로 자라나 평소 엄한 가정교육을 받아왔었던 지라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의 결혼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친정은 대가족인데 반해 시댁은 그야말로 단촐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식구라고는 남편과홀어머님 뿐이었으니 말이죠. 시어머님이 남편에게 거는 기대는 각별했고 그 때문에 제가 받는부담도 컸습니다. 시어머님은 당신과 아내인 저를 남편이 동등하게 대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남편이 저에게 선물이라고 화장품을 사다주면 시어머님은 똑같은 것으로 당신의 것을 원하셨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한 경우에는 제 선물이라도 가져가셔서는 당신이 쓰셨으니 말입니다.비단 화장품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시어머님은 저를 못마땅해 하셨고 경쟁상대로 인식을 하셨던겁니다. 결혼 초기에 저와 시어머님은 '며느리와 시어머니'라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여성 대 여성'인 수평적 관계에 놓여있었습니다.
남편과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해봤습니다. 아이들 셋을 놓고나니 빠듯하던 살림이 남아나질 않더군요. 애들 때문에 방이 딸린 가게를 얻어 장사를 했습니다. 빵가게도 해보고 도배지 가게도 해봤는데 별로 나아지는게 없더라구요.
그해 78년은 지금처럼 나라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렵고 위축돼서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남편과 상의 끝에 하던 장사를 정리하고 다른 일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야쿠르트배달을 시작했고 남편은 이년쯤 쉬다가 주유소 사업을 한다고 나서더군요.
그러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직 새로운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남편은 밸브조작 부주의로 인해가스폭발사고를 당했던 겁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84년 봄 아이들셋과 홀어머님을 남겨 놓고 남편 혼자 먼저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너무 소중하면 망각한다고 했던가요.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던 남편의 소중함.남편의 부재가 안겨준 고통과 좌절이 저를 수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는지 모르는지.열살난 큰 딸애는 자꾸 울어대고 언니가 운다고 둘째도 따라 울어대더군요. 일곱 살난 아들아이는 울지도 않고 말갛게 앉아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보니 허탈한 마음이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이를 꽉 물고 마음을 추스렸지요. '이애들 엄마는 나다. 이 애들 엄나는 나다' 하고요.
십년동안 줄곧 야쿠르트 아줌마로 불렸습니다. 배달하는 동네의 조그만 분식집에서 떡볶이로 점심을 때우고 저녁까지 온종일 걸어다녔습니다. 다리가 퉁퉁 붓고 그 붓기가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허벅지의 힘줄이 툭 불거져 나와 종아리 아래로 축축 쳐지는 바람에 외출을 할 때 치마를입지도 못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다리 모양이야 뭐 어떠랴'하고 체념 겸 위로 겸해서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아이들도 말썽없이 잘 커주고 빠듯하지만 먹고 살만했기에 다행이다 싶었더니 운명의화살이 이제는 제게로 날라왔습니다.
90년 7월 자궁에 몹쓸 병이 생겼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절망의 그림자가 또다시 저를 덮치려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내게 모질게 구는지, 도대체 누구를 원망해야 될 지 몰랐습니다.
그해 여름은 제가 평생 울어도 모자랄 만큼 많이 울었습니다. 다니던 회사도 더 이상 다닐 수 없었습니다. 몸이 너무 아파 집에 줄곧 누워 있었습니다. 시어머님과 아이들의 눈은 근심으로 가득찼고 집은 온통 침울함에 잠겨버렸습니다. 웃음이란 찾아볼 수조차 없었습니다.그러나 그때 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신 분은 바로 시어머님이셨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부터 소원했던 관계가 그때까지 이어져 왔었는데 제 몸이 아프자 따뜻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남편을 잃고 황량한 집안을 이끌어 가던 제가 아프게 되자 걱정이 앞섰던 겁니다.손수 아침을 지어서 며느리 밥상을 차려 주시고 아이들 도시락부터 빨래까지 제가 해야할 일들을 도맡아 해주셨습니다. 아이들의 소풍이나 졸업식날 사진을 보면 저보다는 어머님이 더 많이찍히셨으니 시어머님께서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해주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직장 동료들과 친척들이 찾아왔지만 그들의 위로가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그들이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고 원망했고 막상 그들이 찾아오면 이불을 덮고 돌아누워 버렸습니다. 나 자신이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방학중이었던 딸아이의 손을 잡은채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약을 타다먹고 하는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습니다. 몸이 아픈 것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고 지치게 하는지모릅니다. 온갖 걱정으로 머리가 아프고 마음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투병기간이 길어질수록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짜증만 늘어갔습니다.
그날도 버스를 타고 병원에 찾았는데 한 정거장을 더 가는 바람에 병원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저는 버스안에서 딸애에게 큰 소리로 꾸지람을 했습니다. 아직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어쩔줄 몰라하던 아이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항상 병원에 갈 때마다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따라나서던 아이에게 내가 몹쓸 짓을 했구나 싶어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러다 그해 말에 병이 어느정도 낫더군요. 다섯달만에 다행히도 좋은 소식이 찾아 온 것이지요.주위에서는 기적이라며 놀라워 했습니다. 의사는 깨끗하게 나을 수도 있고 재발할 수도 있으니무리하지 말고 계속 쉬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수술이다 약값이다 해서 십년동안 어렵게 모은 돈을 다 써버렸으니 더 이상 쉬고 있을수만은 없었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아이들 셋 학교도 보내야 했고 세금도 내야 하니까취직은 해야겠는데 마땅한 기술도 없는 형편이라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야쿠르트 배달을 다시 할까 생각도 했지만 의사의 조언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다음해 출판사에 취직을 해서 외판을 시작했습니다. 한달을 하다가 보험회사로 옮겼지요. 그때한창 보험회사들이 많이 생기던 때라 저같은 초보들도 환영해 주더군요.
큰 딸애는 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고로 진학을 하겠다고 우겨대더군요. 돈을 벌겠다고 큰 소리를 치면서 말입니다. 아빠를 닮아 고집은 어찌나 세든지 말려도 듣지를 않더군요. 운좋게도 졸업하자마자 제법 큰 화장품회사의 경리사원으로 입사를 했습니다. 둘째 딸애도 나름대로 열심히하더니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에 탈없이 들어가줬구요. 막내 아들은 공부를 잘해 특설반에 편성돼새벽까지 남아 대입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평탄하게 몇 년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시어머님이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집 근처에 살고 있던 애들 외삼촌을 급히 불러 경대 병원 응급실로 모셔갔더니 진찰결과 위장에 1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이 나 수술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몇시간에 걸쳐 수술을 끝내고 결과가 좋아 다행이라고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이제는 병원비가걱정이었습니다. 수술비도 수술비려니와 병실이 모자라 1인실을 쓸 수밖에 없다는 간호사들의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병원비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돈보다는 건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벌써 두 번이나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면충분한데 두 번이나 깨달았으니 더 이상 이런 아픔 많은 깨달음은 그만 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간절히 빌었습니다.
7년정도 보험을 하다가 장사를 해볼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십년 정도 사람들을 대하는 일을 하다보니 이젠 그런 일에 이력이 났으니 말입니다.그러다가 97년 2월에 조그만 막창집을 인수받았습니다. 보험을 하면서 저녁에 장사를 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딸애의 등록금도 적은 돈은 아닌데다가 곧 막내 아들의 대학입학때문에 보험으로 버는 돈만으로는 너무 벅찼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습니다.아들는 특설반에 남아 새벽까지 공부를 했기 때문에 밤마다 아이를 태우러 학교로 가곤 했습니다. 그런 저의 고됨과 바람을 알았는지 아들은 제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입시철이 끝날 무렵'성균관대학교'라고 찍힌 등록금 영수증을 내미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태껏 제가 낸 고지서 가운데 가장 즐겁고 또 행복하게 낸 고지서였습니다.
이런 아들이 지금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둘째아이는 나름대로의 취직준비로대학생으로서 마지막 한 학기를 보내고 있고 큰 딸애도 아직은 아무 탈 없이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시어머님은 그때의 수술로 오히려 위가 튼튼해지셔서 음식도 잘 드시고 살도 찌시면서 건강해지셨죠. 장사 때문에 집안 일을 돌볼 시간이 없어도 제사나 명절이 닥치면 으레 힘닿는데까지 도와주시고 항상 저의 건강과 가게에 대해 걱정해 주시고 계십니다.
제 가게도 IMF로 인해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물가는 오르는데 음식 가격을 높일 수 없으니수입보다는 지출이 훨씬 많은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나 저만 힘이 드는 것은 아니니까 어쩔 수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은 우리 어른들 선에서 깨끗하게 마무리를 지어줘야지그 짐을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까지 떠넘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도 제 인생에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만족하며 불평만하고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좋았던 일이건, 또 좋지 않았던 일이건 간에 그것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약이되리라는 걸 깨달았다는 게 중요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제가 야쿠르트 배달을 시작하던 무렵인 이십년 전이 지금처럼 이렇게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때 그 시절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제가 젊을 때는 저의 앞날과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며 매일매일을 살았습니다. 이제 그 젊음은 우리 아이들에게로 물려주고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군대간 아들의 제대를 기다리고 딸애들 결혼을 걱정하며그렇게 보내고 있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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