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매일여성한글백일장 산문 여고 부분-당신 곁에

입력 1998-10-24 14:09:00

조금씩 하늘빛 물들어 가는 내 인생길 위에 나를 보는 또 하나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집 앞 마당에다 가슴을 편 감나무보다도 더 서늘한 그늘과 더 달콤한 사랑의 열매를 주는 그 마음은 바로저의 할머니이십니다.

저는 요즘 들어 할머니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생활을 하다 보니까 아침에 나가면 밤 늦게서야 돌아가고 하니까 할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아침 식사때 뿐이였는데 아침마다 할머니가 안 계신 것이었습니다.

"친구분 댁에 가셨겠지"

어머니의 말씀에 저도 그런줄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놀라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할머니 요즘 시골 밭에 품삯일 나가신다. 말려도 기어코 하시겠다고 하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고…"

아! 그랬구나. 순간 내 뺨에 따끔한 구슬이 굴러 내려 갔습니다.

'할머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요!'

석달전, 우리집에도 말로만 듣던 IMF가 쳐들어 왔습니다. 아버지가 25년 넘게 혼신을 기울여 일하던 고향같은 직장에서 구조조정으로 인해 아버지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가슴에 꽂혔을 상처의 창과 앞으로 우리 식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전 그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어머니가 식당 주방일을 얻으시면서 우리집은 전보다는 비록 기울었지만 다시 작은 평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가기가 무섭게 내려 오는 공납금, 보충 수업비, 책 값등은 우리집에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날 아침 "문제집 사고, 보충 수업비 내야하니 5천원만 주세요"

"지금 잔돈이 별로 없구나. 내일줄게"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힘없이 돌아서는 내 뒷모습을 할머니께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품삯일을 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할머니께서 어느 날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늦은 시각에 대문 앞에나와 계셨습니다. 사람의 인기척이 저인줄 아시자 뛰어 오시면서 가방을 얼른 받아 주시며"힘들제? 고등학상이면 잘 묵어야 한다는데…. 아가 핏기가 하나도 없네. 쯧…. 자 이거 용돈 쓰거라. 얻어 묵지만 말고 신세진 친구들한테 한번 맛난거 사줘라"

하시면서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세장을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안받으려고 했지만 할머니의 간절한 눈빛에 전 마네킹처럼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방으로 들어 가시는 걸 보고내 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동생들의 모습이 잠시 나에게 기쁨의 물결로실려 왔습니다.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아 지폐를 폈습니다. 세종대왕의 눈망울에 내 슬픈 모습이 비치는 듯했습니다.

토요일 오후 나는 야간 자습을 포기하고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오늘 기여코 할머니 일 나가시는 걸 말려야지. 암, 자식들 다 있는데 왜 노인이 일을 해?' 이윽고 8시가 되자 대문이 힘없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흙 먼지가 되어 들어 오시는 할머니에게 전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라도 하면 금방 큰 울음이터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씻으시고 방으로 들어오는 할머니는 "웬일로 일찍 왔냐? 몸이라도 아픈 게야?" 하시며 또 내 걱정을 해주셨습니다.

"아니요. 그냥 공부가 안되서 일찍왔어요. 할머니…. 저…. 일 힘들지 않으세요? 다리도 안좋으신데…"하고 슬그머니 제가 말을 꺼내자

"힘들긴, 내가 집에 있으려니 심심해서 그런다. 하나도 안 힘들어. 넌 걱정 말그래이" 하신다. 난흐르는 눈물을 할머니께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날밤, 전 할머니 곁에서 잠을 잤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이 도시로 돈벌러 가시면 시골 할머니댁은 제 집이 되고 할머니는 제 부모님이 되어 주셨지요. 그때의 시골 향기와 정이 지금 할머니의 품 안에는 그대로 서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품은 정말 편안했습니다."할머니, 그 약속 기억나요?"

"뭘 말이냐?"

"있잖아요. 내가 어렸을 적에 입에 달고 하던 말. 할머니가 저 클 때까지 계속 옆에 계셔 주면,제가 할머니 다리 아픈 거 다 고쳐주고, 호강시켜 드린다고 약속했잖아요"

할머니는 그저 빙그레 웃고만 계셨다.

"진짜야, 할머니, 그 약속 꼭 지킬께 오래오래 사세요, 알겠죠?"

난 할머니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내 사랑이 할머니 시린 다리까지 녹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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