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맞이한 해방의 감격은 여성들에게도 뜨거운 새바람을 몰고와 독립된 나라의 건설을 눈앞에 두고서 정치참여와 사회운동에서적극적인 권리행사에 눈을 뜨게 됐다.
해방 다음날인 8월16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박순천.박승호.황신덕.황애덕.유각경.노천명.유영준.정칠성.박원경.박봉애 등을 중심으로 건국준비를 위한 여성의 모임체로서 좌우익이 총망라된 '건국부녀동맹'이 창립됐다.
미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결성된 '건국부녀동맹'은 건국을 위한 여성들의 조직기반을 확립하기위해 위원장 유영준, 부위원장 박순천, 집행위원 황신덕.유각경 등 16명을 선출했다.부녀동맹은 조선의 거국적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돼야만 그 일부분인 우리 여성문제도 해결될 것이며, 여성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거국적 문제 또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부녀동맹에서는 △조선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방 △조선여성의 단결로 완전한 독립국가건설 △조선여성의 의식적 계몽과 질적 향상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남녀평등을 보장하는 독립국가건설을 최종목표로 표방했다.
그러나 진정한 자주독립을 위한 해방군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점령군으로서 일제의 통치권을 대치하는 입장에서 사회개혁보다는 치안유지에 더 치중하면서 여성계도 친일.친미세력이 등장했고, 좌우익 대립이 첨예화됐다.
건국부녀동맹도 출범한지 한달도 채못돼 좌우익 의견대립이 표출, 우익측의 유각경.황애덕.이효덕등이 부녀동맹을 탈퇴, 일제때부터 조직됐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중지됐던 '조선애국부인회'의 조직을 정비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했다.
한편 8월17일 해방전 조국독립을 위해 지하조직을 했던 비밀결사대를 근간으로 임영신.김선.이은혜.손진실.황현숙.한도숙.이계옥.안순득.이순길과 각 도의 대표 1명씩 모여서 여성단체는 아니나 정당으로서 여성단체의 성격을 띤 여자국민당 발기대회를 가졌고 이튿날인 18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민주당 집권시 대통령)씨 자택 대청마루에서 여자국민당 창당대회를 갖고 당수에 임영신을 뽑았다.
이해 9월10일에는 최초의 여기자 출신인 최은희씨가 손정규.박정식.이태경 등 10여명을 중심으로'여권실천자운동'을 조직, 그 당시 초등학교나 중고교에 여자교장이 없었으므로 '여학교 교장은여자로'라는 슬로건으로 여권운동을 벌여 한달만에 3명의 여교장을 배출시키는 개가를 올렸다.한편 중앙정부의 이런 여성계 움직임은 바로 대구 경북지역으로 영향을 미쳐 해방공간에서 각종여성단체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해방 다음날인 8월16일 대구지역 최초의 여의사인 김선인, 사재를 털어 사랑방 여성운동을 편 이명득, 경북지방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요보호여성사업에 진력한 한신덕 등 기독교계 여성지도자들이 정부수립에 기여코자 '기독교건국부인회'를 결성했다.
그런데 8월18일, 중앙에서 임영신이 이끄는 여자국민당이 발기되자 기독교건국부인회 창립멤버대부분이 여자국민당에 참여, '여자국민당 경북도당'을 창당했다.
여자들만의 정치집단이던 여자국민당 경북도당의 발기위원장은 김선인이 지명됐다. 김선인은 2개월동안 경북도내 전역에 걸쳐 조직을 마치고, 10월3일 중앙의 창당대회에 참석하고나니 정식으로경북도당위원장에 올랐다.
이어서 46년5월에는 김선인.이명득.한신덕.김단교.송옥란.김향란 등이 중심이 된 독립촉성애국부인회 경북도지부를 창립하였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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