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마차에서 장사를 하지만 새벽공기가 제법 차게 느껴진다. 어느새 가을인가? 새벽 6시30분. 학원으로 출근하는 첫째 아이와같이 매일 새벽시장을 간다. 시장에 들어서면 사람사는 것 같고 용기를 얻게 된다.애호박 서너개와 푸성귀 몇단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허리굽은 할머니, 확성기를 크게 틀어놓고 차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아저씨, 커피를 파는 아주머니. 모두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서 나자신도 그중의 한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곡예사처럼 그 길들을 빠져나와 재료상으로 간다. 매일만나지만 반갑게 맞아주고 따끈한 차 한잔을 권하는 인정이 있어 기분이 좋다.물건을 주문해 놓고 하룻동안 장사할 재료들을 준비하노라면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떡볶이를 떼어내고 어묵과 떡꼬지를 가지런히 끼우고 나면 가게로 나갈 시간이다. 전문대학 앞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한지 3년이 되었다.
강산이 두 번 반이나 바뀌는 세월동안 같이 살았던 남편이 간암으로 입원한지 3개월만에 우리가족 곁을 영원히 떠났다. 남편이 병원에 있는동안 전세금을 빼내서 치료비로 충당하고 나니 겨우열달을 살 수 있는 사글세 금액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들과 살아야겠기에 일자리를 찾아나섰다.가진 것도 없었고 특별한 기술도 없었으니 몸으로 부딪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아는 사람의 주선으로 식당 주방에서 설겆이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열심히 일을 했는데 한달정도 지나다보니 요통이 생겨서 일을 할 수 없었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친구가 전화를 했다.
"너 분식점 해보는게 어떻겠니?"
"가게 얻을 돈이 어디 있어서…"
"비싼 가게보다는 포장마차를 하는게 어떻겠니? 자리만 좋으면 괜찮다고 하더라. 너 운전면허증있지? 한 번 생각해 보고 연락해줄래?"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 지갑속에 묵혀 뒀던 운전면허증이 생각났다. 그동안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성검사를 받아뒀기에 사용할 수 있었다.
핸들을 한 번도 잡아보지 않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는 "자동차 살 돈은 내가 빌려줄테니 알아보고 연락해. 부담갖지 말고 말이야" 하며 용기를주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 큰 트럭은 부담이 될 것 같아 작은 트럭(0.5톤)을 중고 매매상에서 구입했다.친구는 이자도 필요없고 장사 잘 되면 갚으라며 자동차 구입비보다 넉넉하게 돈을 건네 주었다.장사하기위한 준비도 해야 한다면서. 직장에서 만난 친구는 30년 가까이 친자매처럼 지내고 있는편안한 사이다.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하며 운전연수부터 시작했다.
새벽에는 운전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주방기구와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길을가다가 널판지나 나무 막대기를 보면 주워와서 붙박이 식탁도 만들고 물건을 얹을 수 있게 찬장도 만들어 올렸다. 그릇들은 가게 개업때 받은 그릇들을 사용하기로 했다.
장소 물색을 위해서 학교주변을 일주일가량 다니며 음식도 먹어보았다.
마침 집부근에 전문대학이 있어서 그곳으로 정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여중 2학년인 막내딸이 다니는 학교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춘기인 막내가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환경미화원이나 시장에서장사를 하는 부모님이 창피스러워 피해다닌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었다.
가족회의를 하며 막내의 눈치를 살피는데 막내가 "저 때문에 그러세요? 저는 괜찮아요. 내일부터라도 장사 시작하세요" 하는 것이었다.
재료상에서 가르쳐준 대로 떡볶이를 만들어 장사를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장사여서인지 어색했고 무조건 많이 담아줬다.
몇일 장사를 하면서도 이윤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는게 있었다. 고개숙여 남에게 빌리지 않고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금액을 줄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마음이 젊어지는것 같았다. 대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그렇게 장사를 하던 어느날 호루라기 소리가 나고 봉고차에서 방송과 사이렌 소리가 들여왔다. '어디 사고나 났나?' 하는 생각으로 장사를 하는데 단속반원들이 "차 빼요. 스티커 끊기 전에 어서빼요" 하며 사진을 찍었다. 주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주섬주섬 정리를 해서 그 자리를피하고 있었다. 나도 물건들을 차안에 넣고 덩달아 피했다.
한참 후, 단속요원들이 가고나서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아무일 없는 것처럼 장사를 계속했다. 다시 장사를 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한바퀴 돌아와서 장사를 할려고 하면 차속은 엉망이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어묵물과 간장이 넘쳐서 흥건하게 고인 물을 닦아내면서 울기도 했었다.단속요원과 쫓고 쫓기는 생활을 하루에 몇번씩 겪을 때도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바로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밤 밤새도록 울었다. 남편의 그늘아래서 하고 싶은일을 하며 살던 때가 생각났다. 모임에도 나가고 남편의 월급으로 살림만 했을 때는 돈벌기가 어렵다는 것을 몰랐었다. 남편이 힘들어 할 때 따뜻한 말한마디 못해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포장마차를 시작하고부터 살아가는데 별 어려움없이 살아왔었다. 그런데 지난 봄, 막내가 병원에입원을 하면서 장사도 못하게 됐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막내딸은 일주일이 넘는 기간을 힘들어했지만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러려니 하며 무심히 넘겼는데 조퇴하는 날이 많았다.동네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라며 소견서를 써줬다. 응급실에서 내시경검사를 받았다. 폐결핵이었다.
'폐결핵이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눈앞이 깜깜해지고 팔다리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황당해하는 나에게 의사선생님은 "요즘 결핵은 병이 아닙니다. 약만 복용하면 나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는 말로 안심시켰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위에서도 안심을 시키기 위해 위로했지만 50대인 나로서는결핵이 무서운 병으로 인식돼 있었다.
한달동안 약을 먹고 퇴원을 했다. 전염성도 없으니 학교생활을 해도 좋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대로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막내는 노트를 빌려와서 정리를 하고 뒤처진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다. 무리한 탓인지 3주일만에 다시 입원을 했다. 초음파 검사, CT촬영, 조직검사를 한 결과 간의 수치가 20배 가까이 올라 있었고 결핵균이 대장 임파선까지 번져 있었다.처음과 달리 마음이 불안해지고 겁이 났다. 하는 수 없이 막내에게 휴학을 권했다. 두달이 넘는기간동안 결석을 했으니 진도를 맞추기 힘들 것 같아서였다. 며칠후 막내도 휴학에 동의를 했다.진단서를 발부받아 담임선생님께 휴학원을 제출했다. 막내 사물함에서 책과 체육복을 챙겨 운동장을 걸어나오는데 줄넘기를 하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퇴원후에 막내의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고 책을 정리하고 교복을 장롱속에 거는데 참았던 눈물이쏟아졌다.
막내에게 휴학사실을 알리면서 "미안해 엄마가 장사하느라 너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구나. 우리 1년 늦게 태어난 셈 치자. 건강해져서 내년에 열심히 공부하면 되잖아, 힘내!"
"엄마, 미안해요. 언니들은 모두 건강한데 왜 나만 아픈지 모르겠어요. 나 때문에 병원에 계시느라 장사도 못하시고 어떻해요?" 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두 번째 입원을 한지 한달 조금 지나서 퇴원하게 됐지만 입원비가 걱정이었다. 병원에 있느라 장사를 못했으니 여유돈이 없었다. 입원비를 구하기 위해 몇군데 전화를 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장사를 하는동안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첫째와 둘째가 처음 입원비를 부담했기 때문에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불안했다.
걱정하는 나에게 "엄마, 월급타서 보태면 입원비는 낼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마련할테니 걱정마세요. 이만큼 키워주셨으니 저희들이 해결하도록 맡겨 주세요" 라고 격려해주는 딸들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변변한 옷 한벌 없이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외식비를 아끼기 위해 도시락을 싸다니며 알뜰하게 저축한 돈을 무능한 엄마 때문에 내놔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아팠다. 내 자신이 싫었다.
퇴원을 하루 앞둔 날, 모임의 회원들이 와서 격려금을 내놨다. 거절할 수 없었다. 우선은 퇴원을해야했으니 염치없이 받을 수 밖에.
지난 3년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도와준 친구는 건강을염려해서 보약을 지어 줬다.
모임을 하던 회원들도 추울 때 신으라고 방한화를 보내줬고 불우이웃에게 전해 줄 쌀이 나에게전해지기도 했다. 동창생들도 소식을 듣고 위로금을 전해주며 용기를 줬다.
포장마차를 하는 옆동네에 살고 있는 동창생은 가끔씩 먹을 것을 챙겨와서 이야기 상대를 해주며놀다 가기도 한다. 무엇을 받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씨가 고맙기만 하다.언젠가 세딸들이 말했다.
"우리집이 불우이웃이네. 남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우리들은 엄마를 존경해요. 건강하셔야 해요. 알았죠?"
딸들의 말처럼 부끄러운 일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비록 포장마차에서 장사를 하지만 마음만은 백만장자 부럽지 않다.
젊은이들과 만나는 일이 즐겁고 신이 난다. 새벽시장 다녀오는 길에 만난 학생이 무거운 짐을 가게까지 들어준다. 군에 입대했던 남학생들도 휴가나와서 찾아온다. 잊지 않고 찾아주는 마음이 고마워서 떡볶이 한접시를 담아주면 맛있게 먹고 거수경례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건강하라는 말을 남겨주는 그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시골에서 유학온 학생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다 보면 고마움의 표시로 농산물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은 살맛이 난다. 산다는 것자체가 힘들고 어렵지만 조금만 마음의 문을 열면 더불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3년전 암담했던 그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세 딸 때문이었다. 첫째 딸은 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친다. 오전 수업을 끝내고 점심시간에 가게일을 도와준 후 다시 오후수업을 하러간다. 주말에는 서울에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억척이다.
둘째 딸도 직장에서 퇴근을 하면 친구들과의 약속도 접어둔 채 가게로 나와 일을 도와준다. 두딸은 직접 떡볶이를 만들어 팔면서도 부끄러워 하거나 창피해하지 않는다.
가끔씩은 첫째가 가르치는 학생을 만나기도 하고 둘째의 친구들도 찾아오지만 당당하게 장사를한다. 학생들과 주위 사람들은 착한 딸이라고 칭찬을 해준다.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다.야간부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장사를 끝내는 시간은 밤 11시. 세 딸들과 설거지를 끝내고 하루를닫는다.
피곤하고 힘든 날이었지만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행복하다. 외로울 때친구가 되어주고 힘들어할 때 버팀목이 되어 휘청거리는 엄마를 받쳐주는 딸들이 고맙기만 하다.사글세 방값을 걱정하면서도 세 자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최고에 집착하지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딸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바람이 있다면 첫째가 하고 싶은일이 좋은 결과로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다. 막내도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내년에는 예쁜 여고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내일을 걱정한다. IMF탓인지 포장마차 차량들이 하루에도 몇 대씩 자리를 잡기위해 다녀간다. 마음이 불안하다. 언제 단속요원이 호루라기를 불며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쫓고 쫓기는 생활도 삶의 일부로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즐거움과 진한 삶의 애환이 있는나의 보금자리에서 내일 아침에도 둥지를 틀 것이다.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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